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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JO Dec 06. 2023

아버지 전상서

아버지!

5월 어버이날입니다. 

당신이 쓰러지신 지 벌써 8년이 지났습니다.

1994년 1월에 9급 공무원 시험을 본다고 잘 다니던 은행을 느닷없이 그만뒀습니다. 형 집에 얹혀 지내며 올빼미처럼 공부를 했고 운 좋게 3개월 만에 합격을 했어요.  행여 떨어지기라도 하면 더 이상 갈 데가 없어 영락없이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저를 분발하게 만들었습니다.  


은행을 그만두고 막 공부를 시작했을 때였내요. 그날도 공부를 마치고 밤 12시쯤 문을 열었는데 당신이 거실에 떡하니 앉아계셨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큰 집 누나 결혼식에 참석하신다며 올라오셨다고요. 저도 몹시 놀랐지만 당신께서 몇 배는 더 놀라는 눈빛이었어요.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고 있어야 할 당신의 아들이 머리는 삭발한 채로 모자를 뒤집어쓰고,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은 당신보다 몇 배나 길어 딱 보면 노숙자보다 초라한 행색이었으니까요. 

은행을 그만두었다는 얘기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는 얘기도 일체 말씀드리지 못했었습니다. 그저 최대한 빨리 합격한 후 소식을 전하려 했으니까요. 


'이제 죽었구나'

절을 올리고 당신의 불호령을 기다렸습니다. 당신 앞에 놓인 술병들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릴 때 술만 드시면 무릎 꿇은 자세로 3시간 넘게 인생 설교(?)를 듣던 생각과 화를 내시면 물불 가리지 않으셔서 매번 큰 집으로 도망치던 생각들 때문에요.  

당신은 한참 동안 말씀이 없으셨어요. 너무 화가 나신 것 같기도 하고 몰골이 말이 아닌 아들이 불쌍해 보이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후자이길 속으로 빌면서 더욱 처량해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묵직한 정적이 술잔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는 꾸지람 대신 저의 등을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지요. 형한테서 얘기를 다 들었다고.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열심히 해서 꼭 합격하라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다정한 말씀에 막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주는 당신의 마지막 선물이셨는지요? 더 이상 술잔을 드시지 않는 모습에 약간은 서운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기분 때문에 그날 밤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9급 면접을 마치고 막 7급 시험을 위해 손바닥만 한 고시원으로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고시원으로 돌아왔는데 동네 후배가 찾아와 당신이 쓰러지셨다고 말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아직 전혀 쓰러지실 때가 아니었으니까요. 

한달음에 버스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당신은 조용히 베드에 누워 CT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골든타임이 지나 아무 말씀도 못하셨고, 상태는 그저 위중하셨지요. 눈을 감고 계신 당신은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인자해 보이셨습니다.  저도 삭발이었는데 당신도 뇌수술을 위해 삭발을 하고 계셨습니다. 한여름이었는데 왈칵 찬기운이 느껴졌어요.


수술은 성공적이라고 했습니다. 성공이란 말은 언제 들어도 좋았지만 100% 사람을 만족시키는 단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몸 절반이 마비되어 오른쪽을 온전히 쓸 수 없었고,  뇌가 큰 손상을 입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성공적이라니요. 

두 달 동안 중환자실에서의 사투. 정말로 힘겨웠던 하루하루였습니다. 제가 은행을 그만둔 것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도 들어 몹시 괴로웠습니다. 회갑 때 당신을 등에 업고 마당을 몇 바퀴나 돌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요.

당신이 눈뜨지 못하셨을 때 똑바로 뜬 제 눈이 원망스러웠고, 당신이 걸을 수 없을 때 성한 제 다리가 사치스러웠습니다. 한마디도 못하시는 당신의 성난 입술을 볼 때마다 무능력자 같은 제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한동안 무조건 기도만 했습니다. 목숨만 살려달라고. 하지만 그것이 어리석은 기도였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옛날 그 건강한 모습으로 온전히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어야 옳았습니다. 


당신이 눈을 뜨신 날. 목이 터져라고 제 이름을 말해 주어도 그저 눈물만 흘리셨지요. 언어 기능이 손상되어  더 이상 아름다운 우리말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되셨지요. 어느새 통곡이 언어가 되셨습니다. 벌써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이 지났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제 이름을 부르지 않고 계십니다. 제가 잘못한 것이 많아 너무 화가 나신 건가요? 

그래도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맹렬한 재활치료가 시작되었어요. 한걸음 한걸음 제 몸에 의지하여 걸으시던 당신이 왜 그렇게 왜소하게 느껴지던지요. 제일 큰 문제는 말이었습니다. 당신이 좋아하시던 '두만강' 그리고 '애국가'로 말 연습을 했지요. 그렇지만 당신의 혀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주인인데도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게 이해가 됩니까. '두마.., 동ㅎ...'입술을 땜과 동시에 '시..' 욕으로 변환되었습니다. 이럴 수가요! '비 내리는 고모령'도 '쑥대머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당신 스스로 한 발짝도, 한마디도 못하게 된 현실 앞에 참 막막했습니다. 의학이 발달되었다고 연일 대서특필되는데요. '하면 된다'라고 믿었던 제 좌우명에 대한 확신도 희미해졌습니다.

퇴원을 한 후 누군가 침을 맞고 말문이 트이고, 걷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 방방곡곡을 오갔지요. 한가닥 희망이었으나 매번 혹시나였지만 역시나였습니다. 


다시 보고 싶습니다. 이제 당신이 예전처럼 화를 내시고 우리 삼 형제를 불러놓고 '정직이 첫째라고 늘 말씀하시던 모습이.  밤마다 당신이 뚜벅뚜벅 걸어오면서 큰 목소리로 얘기하는 꿈을 꿀 때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요. 꿈은 현실이 되지 않는가 봅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많이 아파하시던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무리 술에 취해 화가 나 있었어도 큰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바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으셨지요?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을 당신에게 알려야 할지 여러 번 망설이다가 그래도 말씀드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드렸지요. 휠체어를 밀며 큰집으로 향하던 중 다시 되돌아와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큰아버지를 보시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시던 당신. 너무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겠지요. 한편으론 그 충격으로 말문이 트이기를 바라기까지 했습니다. 정말로요. 부질없는 바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어느새 저도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예전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틈만 나면 뒷짐을 지고, 머리 한복판은 휑하고, 흰머리는 또 얼마나 늘었는지 쳐다보기도 싫을 때가 있습니다. 왼손으로 콧등을 누르며 코를 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당신보다 술을 더 많이 마셔 고주망태가 될 때도 있습니다. 아들을 낳아 키워보니 진자리, 마른자리가 어떤 의미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아들이 아직 어려 당신처럼 무릎 꿇리고 연설은 못합니다. 좀 더 지나면 그것도 하고 있을까요? 또 아버지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 운동도 하고,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셨던 '쑥대머리'를 부르며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큰 놈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달려갔을 때에도 웃으시다가 손주 이름이 불러지지 않아 눈물 흘리시던 순간요.  대체 얼마만큼 기다려야 할까요? 째깍째깍 한밤 중 들리는 시곗바늘 소리가 두려워집니다. 마치 한걸음 한 걸음 저로부터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 같아서요. 제발 이제는 툭 털고 그동안 연기하느라 힘들었다 하시고 걸으시고 말씀도 하시면 안 될까요.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당신과 따스했던 기억은 많이 없어도 당신은 항상 제게 거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딱 한 번만이라도 제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02. 5. 8. 불효자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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