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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나래 Jan 12. 2023

설문조사

모두가 행복한 설문조사.

10년째 타지 생활을 하는 나는 1년에 4번 정도 본가에 간다. 오랜만에 집에 가면, 전과 달라진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번은 욕실에 새것으로 보이는 750ml짜리 가글이 있었다. 내가 알기론 평소에 가글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 의아했다. 그나마 유력한 후보는 평소 미용에 관심이 많은 동생이었다. "욕실에 가글 뭐야?" 동생에게 물었다. 동생은 "설문조사 앱에서 시제품으로 보내줬어. 써보면서 좋은 점, 뭐 아쉬운 점 같은 내용을 적으면 포인트를 주거든."


동생을 통해 설문조사 앱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적게는 50원부터 많게는 5천 원까지 서베이가 있는데, 동생은 꽤 오래 전부터 이용해서 5만 원 가까이 적립한 상태였다. 소비자를 알고 싶은 회사와 조금의 수고로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사용자,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해주는 앱까지. 세 집단이 모두 Win-Win 하는 좋은 비즈니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앱을 설치했다. 거주 지역, 나이, 성별 등 기본 인적사항 입력하고 가입했다. 나 같은 수도권에 거주하는 청년 남성 직장인은 흔해 보였지만, 50, 60대 사용자는 가입 즉시 포인트를 지급하는 이벤트를 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앱을 설치하고 알람도 켜두었다. 막상 해보니 동생처럼 가글을 직접 사용해보는 조사는 드물었다. 50원, 100원짜리 필터링 질문만 몇 번 해봤다. 등산을 즐기냐는 질문에는 NO. 캠핑용품을 얼마나 사냐는 질문에 0원. 이렇게 답변하면 결국엔 조사 대상이 아니라며 끝났다. 내가 해당되는 서베이 알람도 가끔 떴지만, 모집 인원이 금방 마감되어 참여하지 못했다. 5만 원은 커녕 1천 원도 모으기 힘들었고, 공개 전의 광고나 서비스도 미리 볼 수 있겠다는 기대도 사라졌다.


특이한 대상을 겨냥한 설문이 대부분이었다. 보상에 눈이 먼 나는 결국 가상의 인간으로 빙의하는 걸 선택했다. 중고차 구매 경험이 없었지만, 중고차 거래 사이트의 장단점을 논하고 있었고, 한 달에 5번 정도 호텔로 휴가를 가며, 시중 은행의 모든 앱을 한 번씩 사용해 본 경험도 풀어놓고 있었다. 한 번은 동생의 가글처럼, 근육에 진심인 운동남으로 단백질 보충제를 받을 뻔했는데 사진 인증이 필요해서 신청 중간에 포기했다. 이렇게 속여서까지 포인트를 쌓아야 하나 싶으면서도 필터링 절차가 너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 업체는 나 같은 악성 사용자의 존재를 몰랐을까? 설문 의뢰자는 결과를 얼마나 신뢰할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오히려 남을 속였다는 죄책감(?)에서 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나 같은 허위 응답자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높은 사람 온다는 행사에 빈자리 채울 용도가 아니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켜 적절한 때에 기립해주고, 박수쳐주는 걸 원하지 않았을까.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들도 내 가상 프로필 '홍길동'의 의견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니면 내부적으로 미리 결론을 짓고 나서, 필수 근거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진행했을 수도 있다.


집단 속에서 개인은 역할로 분류된다. 이 설문조사는 마피아 게임 같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니 거짓이 용인되는 것 같았다. 마피아는 필요에 따라 의사로, 경찰로 시민을 속인다. 게임이 끝나더라도 누구도 거짓말을 한 것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 재미라는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면 되니까. 거짓 응답을 한 나는 분명 잘못했다. 그렇지만 마피아 게임에서 거짓말을 못 하는 바보 마피아는 게임에서는 금방 죽어버린다.


진실은 귀한 것이라, 진실을 갖고 유지하는 데는 큰 비용이 든다. 그래서 사회의 꽤 많은 부분이 효율과 믿음을 이유로 허상에 기반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이런 거짓과 허점이 사회의 낭비로 보였고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유지될 수 있는 비결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 그래도 거짓말은 잘못된 거지.' 싶어 요즘에는 설문조사 앱을 쓰지 않는다. 세상에 진실을 가리는 데 도움은 못 줄지언정, 거짓 한 스푼 더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내 꿈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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