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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나래 May 05. 2023

어린이날에 아저씨가 쓰는 글

버스 자리를 양보하는 아저씨

친구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


붉은 노을 속 한강대교를 지나는 버스 안에서 친구는 존 윅의 줄거리를 요약해 들려주었다. 주인공의 애완견이 살해되었고, 복수가 시작되었으며, 복수가 복수를 낳아 또 다른 복수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 한창 이야기를 하던 중에 4인 가족이 탔다. 부모는 자녀와 짝을 지어 손을 붙잡고 있었다. 엄마와 큰아이가 앉을 자리는 있었지만, 아빠와 작은 아이를 위한 좌석은 없었다. 아빠는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아이의 공간을 확보하고,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친구는 내게 눈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했다. 우리가 자리를 양보하려고 한다는 걸 알아챈 아버지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아들을 먼저 자리에 앉혔다.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그리 큰 호의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입석을 끊고 객실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무심하게 자리를 비켰다. 버스 출입구로 가서 친구의 이야기를 이어 들었다. 아빠와 아들은 자리에 앉은 것 같았다. 얼핏 그들이 하는 말이 들려왔다.


저기 있는 아저씨들, 아니 형들이 자리를 비켜주셨어.



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였다. 아버님은 아저씨라는 말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어 고쳐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냥 아저씨라 했다면 별 생각이 안 들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 말이 머리에 맴돌며 인생 처음으로 아저씨라 불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사람이 북적한 퇴근 시간, 길게 늘어진 광역버스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보느라, 버스가 왔음을 모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앞으로 가요!” 나는 20대 초반 대학생이었다. ‘아저씨?’ 거뭇거뭇한 수염에 담배 냄새가 나는 아저씨를 말하는 것인가 싶어 기분이 나빴다. ‘모자를 써서 몰랐나?’, ‘내가 나이 들어 보이나?’, ‘뭔데 나한테 아저씨래…’ 속으로 별생각을 했다.


그 후로 10년이 지났다. 나이는 30이 넘었고, 학교 다니는 학생도 아니다. 친구 중에 일찍 결혼한 녀석은 갓난 애기도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면 이제 나는 빼박 아저씨가 아닐까 싶다.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날이다. 회사를 바쁘게 다니는 직장인이 정당하게 하루를 쉬어도 되는 소중한 날이다. 자녀가 없고, 어린이는 더더욱 아닌 독신 아저씨가 이리 쉬어도 되나 싶어 어린이날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봤다.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창시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인물이었고, 어린이를 위한 문학을 쓰는 문학인이었다. 그리고,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였다. 아동 문학가인 그는 나라의 독립을 원했다.


어린이날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 강제 노역, 살인, 세뇌, 굶주림이 만연했던 집단 폭력 시대에 어린이는 가장 힘없고 부리기 쉬운 착취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도 어린이의 권리를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자신도 어린이였음을 잊지 않은 그는 정말 좋은 어른이었을 것 같다.


개인의 운명은 시대의 운명을 초월할 수 없다.


제아무리 잘난 개인이라도 시기와 때가 맞지 않는다면 아무런 뜻을 펴지 못한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전쟁도, 가난도, 독재도 없었다.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음은 당시의 어른들 내게 그런 세상을 만들어 준 덕분이 아닐까. 어렸던 나는 시간이 흘러, 버스의 자리를 내어주는 아저씨가 되었다. 새싹처럼 연약한 어린이의 자유를 지켜주는 것. 온당치 못한 이유로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 지금껏 어린이날을 마음껏 누린 내가 지켜야 할 가치가 아닐까 싶다. 오늘 한 번 더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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