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하루에도 수십 번씩 SNS를 들여다본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의 셀카 사진부터 맛있는 음식과 비싼 명품의 물건, 절경을 이루고 있는 풍경 사진들이 끊임없이 업데이트된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은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나는, 왜, 잘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으며 비싼 명품도 없을뿐더러 절경의 풍경을 보지도 못하고 있는가. 왜, 나는 그런 것들을 씻지도 않고 이불속에 누워서 단지 바라만 봐야 하는가, 하는 질투와 시기를 하게 된다.
나는 친구와 삼삼오오 어울려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지나쳤다. 그 여학생은 긴 머리에 백팩을 메고 있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 있었다. 우리 바로 뒤쪽에서 남학생 둘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야, 봤냐. 개 x못이지 않냐. 쟤 우리 학교잖아.
사람들은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고 값을 매긴다. 너무도 쉽게. 평가와 값은 그 가치에 따라 행동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미녀 미남은 추켜세우고, 추녀 추남은 멸시한다. 예쁜 여자를 보면, 남자는 호의적이고 친절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방송과 SNS에서는 외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일상화됐고,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쌍꺼풀 수술은 꽤 큰 수술로 치부됐지만, 지금은 시술이나 누구나 하는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예뻐 보이고 싶고, 멋있어 보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심리지만, 그것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척도가 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받는 연예인을 따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가수니, 배우니 하는 여자들이 아름다운 건 실은 외모 때문이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기 때문이지. 너무 많은 전기가 들어오고, 때문에 터무니없이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 거야. 그건 단순한 불빛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의 무수한 사랑이 여름날의 반딧불처럼 모이고 모여든 거야.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자신의 에너지를 몽땅 던져주고 자신은 줄곧 어둠 속에 묻혀 있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부러워하고... 또 자신의 주변은 어두우니까...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위즈덤하우스, 2009, p185~186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모리스 라벨의 피아노 곡명에서 차용했다. 모리스 라벨은 벨라스케스 디에고라는 화가의 그림인 '시녀들'(책 표지)을 보고서 피아노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마르가리타 공주(책 표지 맨 왼쪽 사람)를 비롯해 공주를 받드는 시녀들을 그렸다. 박민규 작가는 여기서 '공주'에 초점을 두지 않고, 그 앞쪽에 제일 '못생긴 난쟁이'에 집중했다. 책 표지에도 나타나듯이 '못생긴 난쟁이'만 밝게 부각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둡게 처리했다.
못생긴 여자의 이야기
표지가 말해주듯 이 책은 못, 생긴 여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남자는 못생긴 주인공 여자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때까지 못생긴 여자를 많이 봐왔지만 그녀처럼 못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자는 여자에게 호감을 점차 느꼈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는 것이 이 책의 굵직한 뼈대이다. 주인공 남자는 무명의 배우인 아버지와 못생긴 엄마가 있다. 아버지는 처음에 이름을 알리지 못하다가 나중에 잘 풀려 인기를 얻게 된다. 그러자 아버지는 주인공 남자와 엄마를 버리고 홀연히 떠난다. 남자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린 이유가, 어머니가 못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연민을 느낀다. 남자는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거기서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염세적인 형인 '요한'과 주인공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여자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못생긴 자신을 왜 좋아할까 하는 의문까지,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남자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편지를 써서 평소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Complex)를 털어놓는다.
모르겠습니다.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았고, 세상을 증오하지도 않았습니다. 착한 것까지는 아니라 해도 누구를 공격하거나 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뱃속의 생명이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였으며...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위즈덤하우스, 2009, p267
내가 이렇게 태어나기까지 나는, 이유도 명분도 까닭도 모르고 그저 이렇게 태어났다는 주인공 여자. 한 생명이 태어나 골격을 갖추고 점차 자신의 이목구비가 선명해지면서, 어쩐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증오하는 것 같고, 괜히 나에게 불친절하고, 나를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이라고 느꼈을 여자.
세상엔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사람도 많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염치없고 이기적인 생각임을 알고 있지만,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도 많았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들의 장애를 인정해주니까요.
같은 책, p268
여자는 자신의 못생긴 외모를 장애보다 더 심하게 인식하고 있다. 차라리 '못생김'이라는 것도 장애로 분류되어 자신도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다고, 여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외모에 집착하는 것일까?
선천적으로 타고난 외모를 더 예뻐지기 위해 더 잘생기기 위해 더더더... 그러다 보니,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이 됐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외모가 출중한 사람이 정말 많다고 느끼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외모를 예쁘고 잘생긴 것을 100으로 봤을 때,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났던 수술을 했던, 평균이 올라간 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인가... 또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나는 생각했었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닮으려 애를 쓰고 갖추려 기를 쓰는 여자애들을 보며 게다가 이것은 자가발전이다,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본주의의 굴레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같은 책, p308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보자. 매일 자주 접하는 SNS와 방송매체, 광고에서는 외모가 출중한 사진이 올라오고, 연신 예쁘고 잘생긴 외모를 가진 연예인을 추켜세우는 사회 속에 현재 나 자신은 그들에 비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럽고, 대접받기를 바라는 나 자신이 한편으로는 또 부끄럽지만,
그렇게 대접받고 사는 사람이 부러운 것이다.
언젠가는...
타인을 부러워하고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사람에게
외모는 중요하지 않아, 내면이 중요하지
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외모를 가질 때까지, 또는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때까지는 외모지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 또한 지금보다 조금 어렸을 때, 예쁜 여자를 좋아했다. 친구가 소개팅을 주선해줄 때면,
예쁘냐
부터 튀어나오는 것이 사실이고, 친구가 나 여자 친구 생겼어, 라고 하면
예쁘냐
라고 물어보는 것이 어쩌면 남자들 사이에선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시기에 불과하다. 생각이 조금 더 진지해지고,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힘이 생기면 더 이상 외적인 모습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미남 미녀에게 주어지는 관대함에 이제는 피로감을 느껴야 한다. 부자들에게 주어지는 세상의 관대함과 어쩌면 비슷하다. '아름답고 잘생김'의 힘을 얻기 위해 지금도 사람들은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아름답고 잘생긴 사람은 극소수의 사람이며, 그것에 대한 정의도 기준도 없다. 극소수의 사람이 절대 다수인 평범한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 이제 우리는 아름다움과 잘생긴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절대 다수 평범한 사람이 맹목적으로 미남 미녀를 추켜세우고 추남 추녀를 멸시하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문제삼고 싶다.
내면을 보지 않고 겉으로만 드러나는 것만 좇는 게
언젠가는
부질없고, '시시해'질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