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돌봄이 돌보는 세계>
"OO어린이집 입소가 확정됐습니다. 필요한 서류를 안내드리니 해당 기간에 제출하시길 바랍니다."
아직 한 살도 채 안된 아들을 입소시키기 위해 신청한 어린이집에서 확정 연락을 받았다. 혼자 벌어서는 지금의 고물가 시대의 경제상황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에 와이프와 나는 맞벌이를 해야 한다.
우리가 맞벌이를 하는 시간 동안 돌봄 공백을 채워줄 인력과 시간이 필요한데, 결국 어린이집밖에 없다. 어린이집 입소 신청을 한다고 해서 다 되지도 않을 만큼 경쟁률이 상당히 세다. 혹시나 입소 대기를 받으면, 어린이집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을 뻔했는데 사실 번뜩 떠오르는 대안은 없다.
필요한 서류를 챙겨 어린이집에 가서 원장님과 이야기도 나누고, 아들이 지내게 될 어린이집의 내부도 보고 왔다. 어린이집에 보내면 그나마 육아 해방이라고 생각을 했으나, 막상 어린이집을 둘러보고 오니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하는, 여전히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아들이 어린이집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내는 모습을 상상하니 육아에서 탈출한다는 마음보다는 울컥한 마음이 더 커졌다.
그래도, 방법은 없다. 사적 영역인 가족에게 맡기거나 나와 와이프 중 한 명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데, 둘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렇다면 체념할 수밖에.
책 <돌봄이 돌보는 세계>는 '다른몸들'이라는 사회단체가 주최한 연속 강좌인 '교차하는 현실 속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를 위한 돌봄'을 기반으로 구성된 책이다. 돌봄을 주제로 질병, 정신장애, 장애, 권리 등 열 가지 키워드로 선정해 10명의 교수, 활동가, 당사자 등이 한 챕터씩 서술한 책이다.
2025년이면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초고령사회가 되고, 돌봄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는 여전히 돌봄 사각지대에 놓여 있으며,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는 저임금, 차별을 받는 여성이 다수라는 점을 꼬집는다.
인간이라면 타인의 돌봄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에도 돌봄이 존중받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열 가지 챕터를 관통하는 주제다.
"동시에 나이 든 부모, 어린 자녀,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이들을 돌보는 노동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욕망을 점점 더 품게 된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하기 싫고, 누군가 저비용으로 알아서 해주었으면 하는 일, 그것이 돌봄이 처해 있는 정직한 현실이 아닐까." - 본문 중에서
돌봄은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여성'의 일이(었)다. 남성은 밖에서 일을 하고, 여성은 집에서 어린 자녀나 부모를 돌보는 것이 하나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전통적인 효(孝) 사상에 기반한 가부장적 잔재다.
한참 부족하지만 점차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돌봄의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돌봄의 공백을 채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현재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비율이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즉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럼 돌볼 자녀가 없으니 공백도 없다.
이는 저출생 고령화 문제와 긴밀히 맞닿아 있는 사회적 문제다. 아이를 낳으면 돈을 준다고 해도 결혼한 부부들이 외면하는 이유는, 돈은 한 순간이지만, 아이를 돌봐야 하는 시간은 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국가 정책의 전환이 혁명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돌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 책에서는 여성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거 유입해 해결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주자는 우리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값싸게 고용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된다. 각국은 보건의료, 간병, 아이 돌봄과 양육, 노인 간호와 가사노동 분야의 양질의 돌봄 노동자를 데려오기 위해 앞다투어 이주제도를 만들고 있다. (중략) 미국 등과 같은 경제부국은 기존의 공공복지를 축소하고 복지 서비스를 시장화하면서 돌봄을 사적으로 해결할 일로 간주했다." - 본문 중에서
이처럼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고, 제대로된 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며 오히려 차별과 멸시, 혐오스러운 말을 내뱉는 사회에서는 돌봄의 사회화가 이뤄질 수 없다. 돌봄노동자 중 대표적인 직업은 보육교사인데, 어린이집에 아들을 곧 보내야 하는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보육교사 근속연수 1년 미만 39%'의 의미
보육교사의 근속 연수는 2019년 8월 기준으로 1년 미만인 비율이 39%였다. 근데 더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 2월에 보육교사가 나가고 새로 들어오는 시즌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3월에 앞서 2월이면 원아들 중 유치원 입학이나 다른 이유로 나가게 될 아이가 정해지고, 새로 들어올 아이는 확정되지 않은 변동기라고 한다. 만약 원아들 중 아무도 나가지 않고 유지된다고 해도, 원아들이 한 살씩 늘어나 '영유아보육법' 상 연령별 반 편성 기준(교사 대 아동의 비율)에 의해 필요한 교사의 수도 변동이 된다. 즉 필요 없어진 보욕교사를 어린이집 원장이 미리 감축하는 것이다.
"연말에 근무하던 보육교사의 약 30%가 다음 해 2월에 퇴사하고, 그렇게 퇴사한 수의 70%가 그다음 달인 3월에 신규 채용으로 곧바로 메워지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다." - 본문 중에서
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하면 승산할 확률이 크지만,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대부분의 어린이집 원장은 대비책을 마련해둔다. 또한 신고하면 같은 업종에서 소문이 날 확률이 크므로 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전에 아들을 보낼 어린이집을 알아볼 때, 어린이집정보공개포털이라는 사이트에서 꼼꼼히 살펴봤던 적이 있었다. 해당 사이트는 어린이집의 모든 현황을 살펴볼 수 있는데, 교사들의 근속 연수도 살펴볼 수 있었다.
내가 봤던 어린이집의 대부분도 1년~3년 미만이 가장 많았었는데, 위와 같은 이유가 가장 크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보육교사가 계속해서 바뀌면, 전문적인 돌봄과 보육이 가능할까? 이는 서비스적인 측면에서도 고민해야 될 지점이다. 공적 영역도 꼼수를 활용하여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주지하다시피 많은 부모는 아이를 낳아도 마음 편히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어린이집에서 가끔 발생하는 아동학대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우리아이를 위해서 일상적으로 제공되는 돌봄 서비스의 질이 중요해 보인다.
이는 비단 아동 영역만에 문제는 아니다. 노인, 장애인 등 돌봄이 필요한 대상을 위한 서비스의 질은 돌봄노동자들의 안정적인 처우가 뒷받침되는 것이 돌봄이 존중받고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아이를 부모가 돌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주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의 희생
마지막으로 돌봄이 필요한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이다. 흔히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는 노인,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등은 왜 항상 약자로 불리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만약 돌봄이 중심이 되고,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표준 모델이 된다면, 사회적 약자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복지선진국의 대표적인 국가(스웨덴, 덴마크 등)들은 이를 전환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고, 이미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 우리 나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인간은 돌봄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절대적 명제 하에 돌봄제공자들의 많은 희생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돌봄제공자는 주로 여성이었다. 돌봄의 성별 불평등을 해소하고, 더 이상 누군가의 희생이 돼선 안 된다. 돌봄의 문제를 관리하고 해결하는 것이 앞으로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
현재 국가는 장애인 자립, 청년 자립, 노인 자립 등 '자립'을 쉽게 이야기한다. 자립은 자본주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쓸모'의 개념이다. 즉 자립하지 않고 의존하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측면에서도 의존하는 사람은 그들을 위해 많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자립이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이 장애인용으로 되어 있지 않으니 장애인은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적습니다. 장애인이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의존할 게 부족하기 때문에 자립이 어려운 것입니다." - 본문 중에서
우리는 힘들 때 서로 마음 편히, 언제든, 어디서든 기댈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