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공간을 채워 주는 잔잔한 음악이 머리 뒷통수 어디쯤에서 들리는 듯 하다. 한참을 빠져들다보니 피로했던 하루도 그럭저럭 견딜만 해 졌다. 차안에서 혼자 듣는 음악은 너무 좋다.
첫째 아이가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면서 먼 거리를 매일같이 등하원을 시켜줘야했던 날이 있었다. 임신은 했지만 배나온게 티가 나지않아 자리양보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였고 겨우 세살이였던 아이에게도 꽤나 힘든 여정들이였다. 이로 인해 도로주행연수를 결심하게 되었다.
강사는 내가 임신 6개월의 임산부라는 사실에 굉장한 부담감을 느끼는 듯 했다. 이 힘든 여정을 되도록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내가 임산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하루라도 빨리 몸이 편해질 테니 강사를 안심시키는 일은 내몫이었다.
주로 집에서 직장 어린이집까지의 주행을 반복하며 길을 외웠다. 놀라운건 길치라고 생각했던 내가 길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강사에게 길까지 설명해주는 이 친절함이란... 이 작은 사실로 약간의 자신감이 더해졌다.
10시간의 연수를 마치고 이젠 혼자만의 싸움이 될 그것에 스트레스와 긴장감, 기대감이 뒤섞여 한꺼번에 몰려왔다. 고된 여정의 끝을 보고야 말테다!
오로지 내 의지와 능력으로만 차를 몰아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남편을 소환했는데 지옥의 구렁텅이에 온걸 환영하는 분위기를 내뿜는 이 곳에서의 험난한 길이 펼쳐지는 시점이였다. 내 정신상태보다 더 흥분되어진 남편의 격양된 말투와 불안한 눈빛에 갈길을 잃어버린 자아는 모든게 혼비백산이 된채로 구렁텅이의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시는 조수석에 남편을 태우지 않으리..
운전대를 잡아야하는 날은 이미 전날부터 스트레스와 긴장감으로 똘똘뭉친 자가 압박해왔다. 상상속에서 모의주행을 해보고 나름의 차선변경 규칙도 세워보며 손에 땀을 쥔채 도로를 질주하는 꿈속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이런 인고의 시간들을 견디다보면 언젠가는 지나가 있겠지. 숙련된 운전자가 돼 있겠지. 긍정의 달인이 될 지경이였다.
초보운전자에게 대형차를 모는 일은 RV차량의 차체가 높아 시야확보가 잘되고 악셀이 부드럽게 밟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주차엔 어려움이 많았다. 주차에 감이 있다는 강사의 말과는 다르게 이 모든걸 혼자 해야할땐 있던 감마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홀로 첫 주행날'부터 주차사고를 내고 쭈글쭈글해진 멘탈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사태를 예상했을 그는 의외로 침착한 말투로 나를 안심시켜주기까지 하는 걸 보면 조수석에 앉았던 날의 미안함이 조금 남아있는 듯 했다.
그 후로도 이중주차 구역같은 난이도 있는 곳에서 주차사고를 여러번 내고 점점 자신감은 땅속 저 깊은 곳까지 파고들기 시작했다. 여러번의 수리비를 물어주어야 했던 남편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행사고나 인명사고가 아닌게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다독거려 보아도 이내 자존감은 모습을 감춰버렸다. 이 여정의 끝이 오긴 오는것인가.
물어준 수리비로 차한대는 뽑았겠다고 말하던 남편은 나에게 수리비만큼의 가격대인 경차를 사주었다. 뭐 대형차에서 경차로 강등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시내운전을 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기동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마치 한몸이 된 것 같은 안락함과 안정감, 어디든 공간만 있으면 주차가 가능하고 특히 골목길도 문제되지 않았다. 왜 이제야 나한테 왔을까.
종종 도로에서 개매너의 운전자를 만나지만 않는다면 나에게 최적의 맞춤 차인것은 분명했다. 초보때 어설픈 솜씨로 대형차를 몰때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경험들을 접했다. 상대의 무리한 차선변경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경우엔 잘 누르지 않는 클락션을 소심하게 눌러주곤 한다. 대부분은 비상깜빡이로 미안함을 표하지만 정말 개매너는 그마저도 무시해 버린다. 경차라서가 아니라 그런 운전자는 원래 그런 부류일순 있겠지만 대형차로 주행했을땐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였고 운전습관으로 운전자의 인격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분신은 처음엔 아이의 등하원이 주였고 익숙해 졌을땐 비슷한 거리의 친정집을 오가다가 고속도로를 타는 먼 길을 다니게 되었다. 아이들과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이 역마살을 굳게 믿는 나에겐 큰 위안을 주었다. 특히 아이가 아파서 병원을 가야할땐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몇년동안 나를 베스트 드라이버로 만들어준 기특한 녀석이다.
그렇게 긍정을 해댔던 숙련된 운전자가 되니 이젠 다시 큰 차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짐이 많을땐 조수석에 사람을 태우기가 힘들고 카시트가 두개이다보니 좁은 공간이 더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기동력이 딸리다보니 고속도로 주행때는 속터지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되고 아이들과 다닐땐 안전상의 문제가 가장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은근히 약을 올리는 요상한 운전자들을 만나면 짜증이 밀려온다.
아마도 큰차로 바뀌면 주차의 매력은 사라지겠지만..
최고의 음질을 자랑하는 스피커를 장착하고 예쁜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썬루프와 자동으로 움직여지는 사이드미러, 버튼으로 작동할 수 있는 시트까지.. 업그레이드 된 차가 나에게 오기까지 베스트 드라이버로 만들어준 이 차에 더 의지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조수석에 남편을 절대 태우지 않겠다는 다짐은 몇년동안 지속이 되었는데 운전실력이 검증되고 나서는 없던 일이 되었다. 가끔 대리운전을 해 줄 때도 있는데 잔소리가 줄긴 했지만 없어지진 않은 걸로 보아 아직 나의 운전실력에 조금의 불안함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썩 유쾌하지 않다.
언젠간 고속도로 주행시 조수석에 태울 날이 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