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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월 Oct 15. 2023

감사의 태도

뒤돌아 보아야 볼 수 있는 진심의 가치

오후의 해가 가장 뜨겁게 내리쬐는 시간에 아이 돌봄픽업을 가는 날이면 늘 횡단보도에서 봉사를 하고 계시는 할머님과 마주치곤 한다. 인사를 드리면 너무나 밝은 얼굴로 맞아주시는데 우리의 인사는 한번으로 끝날때가 거의 없다. 할머님의 공손한 인사에 머쓱해져 한번더 고개를 숙이면 할머님 역시 한번더 인사를 해주신다. 가끔 할머님이 안보이시는 날이면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닌지  아프시거나 한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궁금해 지는데 다행히 다음날엔 늘 그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서 있기만 해도 뜨거운 햇볕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던 여름날. 집을 나서면서 요구르트를 파시는 분을 발견하고 문득 이 더위에도 나와 계실 할머님 생각에 요구르트를 한봉지 가득 샀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더위를 묵묵히 견녀내시는 할머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오며 가며 인사만 나누었지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가 불편할법도 한데 할머님께서는 연신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에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오늘도 웃음가득한 표정으로 큰 감사함을 표현하는 할머님의 말씀엔 세월의 흔적과 진심이 서려있었다.

나는 얼마나 감사하고 살았던가.

​엄마가 매번 챙겨주시는 용돈과 반찬들, 팔아먹지 말고 모아 두라던 엄마 스타일의 금붙이들, 먼저 전화드리는 날보다 먼저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에 더 많은 대화가 오고갔던 지난 날들이 스쳐갔다. 이걸 조금은 당연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살진 않았는지에 대한 미안함도 함께.

​감동의 보답으로 건넨 요구르트를 할머님은 한사코 받지 않으셨다. 혹시 혈관질환을 앓고 계셔서 드시지 못 하거나 교훈의 값어치로 받기에는 소소하거나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료수에 대한 불안감이 있으실 수도 있으니  멋쩍은 손을 슬며시 감춰보며 두번의 인사를 한뒤 돌아섰다.​

​아이는 한봉지 가득한 요구르트를 보며 신이났다.

​"내가 목말라서 쓰러질것 같은거 어떻게 알았어? 역시 엄마는 센스쟁이야"

​이럴때만 최고의 찬사를 선사해주는 아이는 요구르트를 옆에 친구에게도 나누어주며 생색으로 한껏 들떠있었다. 거기에 "우리 엄마가"라는 말도 덧붙여 주렴.

​블로그에 썼던 글들을 모아 작가신청을 하고 별 기대없이 보내고 맞이한 이틀째 되던날 믿기 힘든 합격소식에  하루에도 두세편의 글을 써댔던 적이 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꿀같은 시간을 글쓰기로 꽉 채우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요즘은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는 일이 일상으로 다가왔다. 많은 지식을 나누어 주는 시간, 다사다단하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한 당신의 삶에 손님으로 초대해준 보답으로 라이킷을 누르며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인것 같습니다'라며 돌아서곤 한다. 고뇌의 결과로 빚어낸 글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저의 글에 라이킷을 남겨 주시는 분들에 대한 감사함은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일이 수치화 되어있는 시스템에 영향을 받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몇일전 지인들에게 홍보를 한적이 있는데 그 다음날 메인에 뜬 얼빡(얼굴이 크게 나오게 찍은)사진을 보고 부끄러움에 몸서리 쳐진적이 있다. 역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일은 부담감을 필요로 하는 일임을 다시 한번 느끼며 많은 사람들의 동채시력에 얼빡사진이 남아 있지 않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어떤 사진으로 바꿔볼지 구상해보는 다중인격적인 정체성에 실소가 터져나왔다.

​친구에게 글을 쓰는 건 재밌는데 점점 현타가 오는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너의 글을 진심으로 읽어주고 느껴주는 나같은 독자들에게 집중해"

​늘 실실거리고 해맑은 영혼이 나같은 허당일거라고 생각했던 친구의 조언은 속세에 물든 나를 끌어내 주었다.

단 한명의 독자라도 읽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글을 써보겠다고 했던 포부를 다시 마음 한켠에 꼭꼭 눌러 담았다. 잘 쓰려고 하지 말고 그냥 쓰자고 말이다. 브런치의 어떤 글에서 글은 많이 쓰는 것에 집중해야 하고 너무 많은 퇴고의 과정은 본질을 헤칠 수 있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퇴고에 목숨걸었던 때라 이해가 가기도 하고 않가기도 했는데 요즘에야 글의 의미를 조금 받아들이게 되었다.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는 가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듣게되어 그의 오만함에 반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 달시는 엘리자베스의 지성과 위트있는 재치에 점차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달시의 나쁜 첫인상에 대한 편견이 굳어져 그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달시의 오만함이 편견을 낳았지만 사실 달시의 차가운 첫인상과는 다르게 그를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경을 받고 마음이 깊고 배려를 할 줄 아는 인물이다.


브런치 작가에 한번에 합격했다는 오만이 어쩌면 이 잘 써질것 같다라는 편견으로 다가온 것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잘 써지는 일 또는 잘 써나가는 일보다 그냥 쓰다 보면 달시의 깊은 배려심과 따뜻한 마음정도는 느껴지지 않을까.


​노력의 열매에 비례하지 않은 요행을 바라는건 왠지 씁쓸함을 남긴다.

​왜 늘 감사함은 때묻은 생각들에 묻히는지 모르겠다. 수치들에게 인정을 받기 전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전에 읽어 주시는 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더 느껴보는 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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