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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월 Oct 18. 2023

기다려 줄테니 발걸음을 옮겨 봐요

거북이가 물살을 타면 빠르게 헤엄친다.

차갑고 무겁게 내려 앉은 기온에 바짝 움츠러 든 아침.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탓에 겨우 10도 안팎이였던 날이지만 오들오들 떠느라 옷깃을 여미고 바삐 움직여 본다.

 횡단보도에 서있다가 멀찌감치에서 오는 용달차를 발견하고 '먼저 지나가세요. 저는 조금 더 기다렸다 건널랍니다'하고 일부러 먼산을 바라보며 아이와 신나게 쓸데없는 말들을 내뱉는 중이였다. 용달차의 운전자는 클락션을 살짝 울리며 창문 너머로

​"먼저 건너가세요. 어서요"

​꽤 다급하게 손짓하며 친절한 양보를 풀었다.
아마 일곱살쯤 돼보이는 작은 아이가 짧은 다리로 급하게 건너기 전에  '내가 충분히 기다려 줄테니 어서 발걸음을 옮겨 봐요'라고 말하고 싶었거나 아이와 함께 있는 여자가 바람까지 부는 날씨를 견디기 힘들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라도 챈듯이 말이다.

​허리를 굽히고 감사인사를 하고 지나가다가  용달차에  '코로나 19 백신'이라고 적혀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양보를 배푼듯 보였던 그분은 백신을 약속된 시간안에 배송해야하는 중대 임무를 맡고 있는 건 아니였을지. 양보와 시간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차마 지나칠 수 없는 영혼들에게 그래도 양보를 택하려 마음이 급해지진 않았을지. 일부러 차를 세우면서까지 길을 터주었던 고마움이 세찬 바람에 차가워진 체온을 녹여주었다.

​오래된 아파트의 지상 주차장에는 퇴근시간이 되면 이중주차로 주차공간이 없어 그 일대를 한두바퀴는 돌아야 간신히 빈 자리에 차를 대곤 했다. 출근시간이 지나면 모자를 눌러 쓰고 나가 멀리 대놓은 차를 가까운 지상주차장으로 옮기는 일은 번거로웠다. 추운 겨울에 아이들을 오래 걷게 할 수가 없어 귀찮음보단 의무감이 컸다.

​초보운전이라는 명목하에 천천히, 안전하게, 차분하게, 조심조심.. '느림'이라는 의미는 다 갖다 붙여서 이중주차되어있는 구간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뒤에 기다리고 있는 차량으로 달려가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 그 뒤에 있던 차량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차가 제가 타기에는 크기도 크고 이중주차 되어있는 공간에서 큰차를 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더군다나 저는 이제 연수를 갖 마친 햇병아리 운전자에요. 조금만 너그럽게 기다려 주 실 수 있나요? 정말 죄송하지만요 ㅠㅠ '

​단 한마디도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연신 사과를 하며 도움주신 분에게까지 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스러울 따름이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멘탈을 주어담으며 베스트 드라이버를 꿈꾸는 험난한 여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얼마전 퇴근시간에 주차장에서 비슷한 상황을 목격했다. 몇년 전 나의 모습을 닮은 운전자는 어찌할바를 모르고 차단기와 씨름하느라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출구를 막고 있었던 차량 뒤로는 나를 포함해 대여섯대의 차가 줄지어 있었다. 차에서 내려 상황파악을 위해 자초지종을 여쭈었다. 주차정산에 해당되지 않는 영수증을 계속 스캔하고 계셨던 분에게 카드결제를 해야함을 알려 드리고 나서야 상황이 종료가 됐다. 꽤 오랜 시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락션을 울리거나 고함을 치는 사람은 없었다.

​몇년 전 나에게 역정을 내시던 그 분이 답답함에 소리를 지르기보단 해결을 위해 도움을 주는 미덕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누구에게나 처음을 거쳐야만 하는 시간들이 있고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제일 속상할 사람도 처음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작의 첫걸음을 조금은 느긋한 시선으로 동행해 준다면 많은 이의 첫걸음은 두려움보단 자신감으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열리지 않을까 싶다.

​언제부터인가 빠름을 지향하는 사회분위기는 느림의 미학이나 여백의 미가 상실되고 드라마의 중요부분만 편집한 영상을 하나로 합쳐 짧은 시간안에 정주행이 가능하게 되었고 팩폭(사실 증거를 갖다 대면서 무참히 짓밟음)같은 줄임말 신조어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에게는 워라벨이 중요해지고 휴식같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하루에 끝내야 하는 첩첩산중인 일을 해내느라 성격은 급해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두배속의 시간들이 바쁜 사회가 낳은 미완성의 결과물 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 속에서 중요한 것이 잊혀지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아이와 아쿠아리움에 갔을 물속에서 헤엄치는 거북이를 보고   "엄마 거북이가 왜 이렇게 빨라?"라며 신기해 하곤 했다. 지에서는 느림의 상징인 거북이가 물살을 타면 빠르다는 사실이 신기했던지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거북이가 어디로 가는지 한참을 지켜보았다. 거북이의 헤엄속도는 꽤 빨랐다.


아이와 손잡고 거리를 거닐며 말 수가 급격히 많아진 꼬맹이는 신이 난 모양이다. 바람도 많이 부는데 춥진 않은지 물었더니 이렇게 손잡고 엄마랑 걷는게 너무 좋단다. ​한시간 정도 떼울 곳이 필요했던 우리는 근처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유자차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향긋한 유자향을 풍기는 차를 한모금 들이키니 그제서야 차가워진 몸에 온기가 도는 기분이 든다. 좀 전에 그 용달차 아저씨는 시간안에 잘 도착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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