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밖의 이름들』을 읽고
범행 후 피해자의 태도 중 ‘마땅히 그러한 반응을 보여야만 하는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 사정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할 수 없다. (p.29)
추석 연휴로 동창끼리 모였다. 고생 끝에 공무원이 된 친구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뒤섞다 차마 웃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누군가 자신을 빤히 쳐다봤다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A가 말했다. 나는 고해성사하듯 손을 들었고 공무원은 망설임 없이 나를 가리켰다. B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란 듯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코앞에서 직접 겪어보니 이처럼 불쾌한 게 없다.
관찰인가, 관음인가. 애써 변명하자면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기 싫어서라고 하겠다. 이 주의사항은 우연한 만남에서 새겨졌다. 나는 말을 더듬기로 유명한데 나보다 심한 남자가 있었다. 그와 대화한다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퍼즐을 맞춰야 한다. 그가 입술을 움직이면 어떤 문장이든 반 토막, 세 토막이 났으니. 반전은 그가 언어의 천재라는 것이다. 그가 쓴 문장은 생동감이 넘쳤고 두 문장이면 세계가 보였다. 그때의 만남 이후로 나는 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오래도록 보는 버릇이 생겼다.
피해자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범죄가 남긴 고유한 흔적이며, 법은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p135)
태어나자마자 세상에 공감한 사람이 있을까. 눈을 뜸과 동시에 그는 세상을 시작한다. 멀리서부터 꽃잎을 뿌리는 사람이 있고, 중력을 비틀어 발을 끈끈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눈을 감고 벽에 닿을 듯 서면 머릿속 센서가 웅얼대듯 저마다 풍기는 아우라도 다르다. 맞물릴까, 충돌할까. 서로 다른 세계가 부딪혀 불꽃이 튀어 오르는 걸 과연 몇 번이나 알아채는지. 깍지를 꼈으면 좋겠다. 그러면 감정이 전해진다는 착각이라도 들 텐데.
어쨌든 동의한 적 없는 정의가 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법부터 배웠다. 울타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일 말뚝만 붙들 수 없다. 지구에 사는 인간은 너무도 많고 한 사람만 뚫어지게 보아도 뒷머리에 붙은 먼지를 발견할 수 없다. 카페에 들어서면 종종 누구를 향한 험담이 들린다. 유명한 사람이거나 이웃집 아들이거나 혹은. 약간의 거북함을 느낄 뿐, 표정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단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나도 커피를 홀짝이며 그들을 멋대로 단정한다. 그렇게 그들은 동의한 적 없는 그들이 된다. 당사자는 얼마나 불쾌할까. 아, 이것도 잘못됐다.
피해자는 감정으로 말하려 하고, 법은 사실과 증거를 원한다. 이 간극은 때때로 너무 넓고, 차갑다. (p.239)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부럽다. 터질 듯한 콜라 속에서 기포를 일일이 셀 줄 아는 사람들, 어디든 흘리지 않고 정확하게 부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뚜껑이 밉다. 터질 듯한 콜라병에서 압력을 고려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참고서적: 서혜진, 『법정 밖의 이름들』, 흐름출판, 인용 p.29, 135, 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