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가 흔들리면 손을 흔들자

『세상에 = 똑같은 = 개는 ≠ 없다』를 읽고

by 돈끼호떡

강아지와 산책을 나서면 모자를 눌러쓴다. 고리형 손잡이가 있어도 목줄을 두세 번 감는다. 아무리 작은 개라도 개는 개라는 생각으로. 사람이 걸어오면 목줄을 짧게 잡고 강아지가 걸어오면 고개를 숙인다. 꼬리를 흔들며 서로의 체취를 맡는 사이, 보호자는 그저 기다린다. 꼬리가 흔들리면 목줄도 흔들리고, 나는 목줄을 쥐느라 손을 흔들지 않는다. 강아지에 대한 물음이 드물게 오고 가지만 그뿐이다. 그 강아지는 떠나면서도 꼬리를 흔든다. 잘 가라고 배웅하는 손 같다. 나와 강아지는 다시 산책한다. 그 강아지는 이뻤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그 사람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태도로.


인간과 개 모두 사회적 세계 속에서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되는 협력적 의사소통에 특화된 지능을 갖고 있다. (p.71)


‘동물은 좋아하지만, 강아지만 사랑해서는 안 된다.’ 대학 시절에 들은 한 교수의 발언을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모든 생명을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킨을 뜯을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아지를 태운 유모차, 일명 ‘견모차’가 아기를 태운 유모차와 나란히 서는 걸 보자 교수의 말이 되돌아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분양받으러 사육자를 찾아가 견종을 말했을 때 유일하게 보장되는 특성은 신체적 외모뿐이다! 녀석이 자라면서 어떤 개가 될지는 견종과 거의 상관이 없다. (p.143)


작년 초에 강아지를 입양했다. 처음 온 아이는 웰시코기였다. 엄마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강아지의 눈이 마치 사람과 같아서 조금 무섭다고 하셨다. 다음으로 데려온 강아지는 다행히 엄마의 눈에 들었다. 우리는‘여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칭얼댈 때마다 누나는 정성으로 보살폈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만, 강아지를 사랑하진 않았다. 그 교수의 지적과는 다르게 나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여울이는 “가자”라는 말에 예민하다. 강아지가 낼 수 있는 소리는‘왈왈’이나 ‘끼잉’밖에 없다고 여겼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가자”라고 말하면, 여울이는 입을 우물거리며 짖곤 했다. 구시렁거린다는 말이 적절해 보인다.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놀리지 말라는 건 분명했다. 그러면 연달아 “가자”를 외쳤다. 여울이에게는 미안했지만, 대화가 되는 것 같아 신기했다.


문득 강아지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는가? 이처럼 강아지가 우리 눈을 쳐다보면 우리 몸속에서 옥시토신 분비가 늘어나 강아지를 더 쳐다보고 싶어진다. 강아지 역시 옥시토신 분비가 늘어 계속 사람을 쳐다본다. (p.172)


여울이는 일광욕을 즐긴다. 햇볕이 좋은 날이면 늘 소파에 있다. 아침에 나오면 그 자리에 앉아 지긋이 바라보는 여울이가 있다. 꼬리도 살짝 흔들어 준다. 나는 쭈그려 앉아 여울이를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와 이렇게 눈을 마주친 적이 최근에는 있었나. 여울이와 눈을 마주 보는 건 왜 불편하지 않을까. 너는 강아지라서 그런 걸까.


멀리서 강아지가 다가오고 여울이가 꼬리를 흔들 때, 나의 손도 흔들렸으면 좋겠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어쩌면 반가움이 본능적인 핑계로 드러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용기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적어본다.



참고도서: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세상에 = 똑같은 = 개는 ≠ 없다.』, 디플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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