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로 집을 수 없는

『그거 사전』을 읽고

by 돈끼호떡
“소개팅 상대에게 카레가 담긴 소스 보트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망했다.” (p.33)


발음이 어눌하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벌렸다가 다물기도 여러 번이다. 성우 학원에서 들은 첫 번째 지적은 거울이었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니까 네 말이 어눌한 거야. 거울 앞에서 나는 ‘ㅐ’와 ‘ㅔ’를 연습했다. 입을 크게 벌렸다가 작게 벌렸다가.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문을 급하게 읽다 보니 히읗이 자꾸만 이응이 돼버렸다. 뒤늦게 알아챈 내 오랜 습관이었다.


히읗이 나타날 때마다 혀를 깨물 수는 없었다. 잠깐 기다려, 이 부분은 발음을 주의해야지. 허공에 입김을 새기듯 모든 말을 꾹꾹 내뱉느니 차라리 마스크를 쓰겠다. 다 마스크 때문인 걸로. 이왕이면 입술의 움직임을 마스크가 인식하고, 글자가 겉면에 정확히 나타나 상대방이 읽는 방식은 어떨까. 아아, 그러면 그거가 문제가 되겠다. 그거는 그거라서.


“휴지심도 표준어가 아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쯤은 만나는 생활필수품임에도 여전히 이름 없는 ‘그거’인 셈이다.” (p.199)


‘했습니다’ 같이 히읗은 자연스럽게 쓸리고 또 남모르게 사라지지만, 집에서는 의의로 당당하다. 외할머니께서 가스 불을 깜빡하시면 나는 큰 소리로 할머니를 부른다. 할머니, 저거 언제부터 끓이신 거예요? 히읗이 밖으로 나오다 잠시 혀끝에 걸린다. 확실히 히읗이다. 할머니가 알머니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친할머니를 불러 본 적은 없다. 아빠의 말씀으로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온화한 분이셨다고. 제사상 사진으로 뵈어도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4월 초에는 친할머니의 산소를 벌초했는데 주변에 할미꽃이 피어 있었다. 꽃잎의 솜털을 만지며 나는 ‘온화하다’라는 표현을 곱씹었다. 할미꽃은 참 보드라웠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뚫어뻥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무명의 물건을 어떻게든 팔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렇다.”(p. 204)


친할머니의 산소는 며칠 전에도 벌초했다. 몇 개월 전에 자른 풀줄기가 나무젓가락처럼 푸석했다. 그때 그 할미꽃은 보이지 않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낙엽이 산소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그 위로 서리가 곰팡이처럼 피어 있었다.


아빠가 예초기를 돌리고 나는 갈고리로 낙엽과 풀 무더기를 모아서 버렸다. 해가 떠오를 때쯤 산소는 깨끗했다. 어느새 입김은 사라지고 나는 말의 형태를 가늠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돗자리를 펴고 친할머니께 절을 올렸다. 몸을 낮추는 사이, 그 찰나의 웅크림 속에서 나는 무언가를 짜내야 했다. 메마른 풀잎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모든 짐을 챙기고 내려갈 시간이었다. 몇 번을 다듬어도 산소는 까슬까슬했다.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러고 보면 내 입술이 부르튼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마음이 앞서면 입술만 촉촉해지나 보다. “갑니다”라는 짧은 인사를 남기며 나는 아빠를 뒤따라갔다.


참고서적: 홍성윤, 『그거 사전』, 인플루엔셜. 인용 p. 33, 199, 204.

매거진의 이전글너는 어제의 온도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