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스페이스(Backspace)와 춤을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를 읽고

by 돈끼호떡
환경에서 말하고 쓰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 우리 문인들은 국어를 갈고닦는 자기 수양은 조금도 하지 않고, 일어·영어·중국어와 낡은 한문투 문장을 경쟁하듯 모방하면서 알량하게 타고난 잔재주를 보배 삼아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치졸한 문장으로 이야기책을 써서 우리말을 오늘의 참상으로 몰아넣고도 전혀 반성할 줄 모른다. (7쪽)

편의점에 출근하면 매대를 돌아다니며 상품의 소비기한을 확인한다. 전 근무자는 08시와 20시가 헷갈리나 보다. 나는 오후 8시를 맞이하듯 샌드위치를 폐기한다. 어떤 건 내일까지고, 어떤 건 모레까지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겼다는 도시락이 차갑다. 전자레인지는 이 가공된 사랑을 덥힐 수 있을까. 결말은 퇴근 시간까지 유보된다. 결말은 퇴근 시간까지 알 수 없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컵라면을 산다. 내가 일하는 매장에는, 내가 일하는 점포에는 탁자가 없다. 여자아이가 라면을 계산대에 잠시 올려도 되냐고 물었다. 마침 손님이 없어서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앞서 밖으로 나간 남자아이가 쭈뼛거리며 다시 들어왔다. 실수로 문앞에, 문 앞에 라면을 쏟았다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나는 화나지 않았다. 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

매장은 물품·차표·입장권 등을 파는 곳을 뜻하는 일본말 ‘うりば’의 한자 표기인데, 우리말로 오인하고 예사로 쓴다. … ‘매장’에 상응하는 순수한 우리말은 ‘가게’고, 한자어는 ‘점방(店房)’이나 ‘점포(店鋪)’다. (340쪽)


나더러 착하다고 말했다. 스위트(Sweet)하다고 말했다. 나는 달콤한가? 달콤한 나는 속이 니글거렸다. 아이스크림 냉동고에는 수프 봉지가 매콤하게 뜯어져 있었다. 친절하다거나 좋은 분이라고 말했다면, 구시렁거릴수록 깎다 만 수염이 아래턱을 찔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가 가게로 들어온다. 외국에서 왔는지 발음이 미끄러진다. 물에 적셔 쓰는 휴지가 어디에 있어요? 아, 물티슈요. 이쪽입니다. 휴지는 많지만, 물휴지는 물티슈는 하나밖에 없었다. 심지어 원 플러스 원이다.

‘무엇’이라고 할 것을 ‘무엇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더없이 자명(自明)한 명제를 뜻없이 격식화해서 말에 때를 묻히는 버릇이며, 국가나 사회의 과제와 국민의 관심사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단정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이라고 얼버무리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소신도 없이 남의 일처럼 무책임하게 내뱉는 표현이다. (255쪽)

가스활명수 있나요? 왼쪽으로 들어가셔서 상단을 보시면 있을 겁니다. 이 카드로 결제가 되나요? 한번 해보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잘 모르는 건 스캐너로 찍는다. 스캐너는 단호하니까.

가게가 조용해지자 스마트폰을 꺼냈다. 새 메시지에는 노출이라는 단어가 유출로 변경되었다. 이전 메시지에는 여전히 노출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쳐 써도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록도 단호하다. 내 뒤에는 담배 진열대가 있다. 스위트한 나도 물러설 수 없다.

참고문헌: 이수열, 『이수열 선생님의 우리말 바로 쓰기』, 현암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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