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에 담긴 나의 정체성

내가 산 것들이 나를 설명해 준다면

by 진주

어떤 것을 소비하느냐는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생각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언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은 쿠팡의 후기를 읽다가 어떤 사람의 구매 내역 전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생활 방식이 보이더라구요.


가령 냉동식품을 자주 사는 사람이라면 바쁜 직장인 같고, 야채를 많이 사거나 '무가당', '저당' 등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건강을 챙기는 사람. 책꽂이, 무드등을 사는 사람이라면 조용한 시간을 즐길 것이고, 등산화와 간식을 사는 사람이라면 활동적인 취미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같은 거죠.



그래서 저도 저의 주문 내역을 쭉 살펴봤어요.

매니큐어, 매스틱, 양배추즙, 브로우 마스카라, 유산균, 사과당근즙, 레몬맛 비타민, 립틴트, 트리트먼트, 베이지색 샌들, 산양유 단백질 분말, 네일 영양제, 볶은 서리태콩, 건포도, 호박씨, 검은콩 두유, 컨실러, 마스크팩, 메이플 시럽, 요거트.


겹치는 것을 제외하고 적어본 목록은 꽤 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어떤 사람처럼 보이나요?


저는 건강식품이나 보조제를 꾸준히 챙겨 먹고 있어요. 냉동식품이나 과자는 잘 사지 않아요. 화장품도 오래 고민한 뒤에야 구입하는 편이에요. 뭐든 한 번 사고 나면 그 물건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마음이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다 써서 버릴 때까지 새 물건을 사지 않아요.



그렇다고는 해도 궁금증이 많은 타입이라 새로운 것을 보면 한 번쯤은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이번에 산 '우유 시럽 매니큐어'가 딱 그랬습니다. 하얗게 그라데이션 한 손톱을 보면 얼마나 만족감이 들까요. 한참을 장바구니에 방치하듯 담아두다가 마침내 구매를 했습니다.


어딘가에 찍혀서 금방 닳아버리는 게 신경 쓰여서 번거롭기도 하지만, 하얀색이 주는 단정한 느낌에 손톱을 볼 때마다 확실한 만족감이 들었죠.


저는 충동구매를 거의 하지 않아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한참을 씹고 뜯고 따져봐요. 가치가 있는가? 꼭 필요한가? 등 엄격한 질문 테스트를 통과해야 비로소 구매 승인이 떨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후회하는 일은 드물지만 누군가를 위한 선물이거나 특별한 이벤트 혹은 여행길 위에선 평소보다 느슨하게 생각하고 빠르게 결정해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두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


어떤 소유물이든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져요. 장바구니에서 삭제하고 나서 일주일만 지나도 무엇을 사고 싶었는지 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일회성 소비보다는 오래 남는 만족을 주는 소비를 하고자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있어요.


결국 소비는 나를 자유롭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속박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무엇을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고르느냐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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