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을 강아지처럼 보기
평화로운 금요일 퇴근을 코 앞에 둔 시간이었다. 갑자기 타 부서에서 급하게 나를 찾았다. 간단한 질문 사항일거라 짐작하며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대뜸, 어림잡아 1시간도 넘게 걸리는 일을 지금 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본인이 월요일 오전에 바로 이어지는 업무와 연관이 있어 급히 부탁한다고 했다.
그는 나보다 직급이 높아서 우선 차분하게 대응했다. 그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리며 나는 오늘 약속이 있어 나가봐야 한다고 했다. 또 지금 허둥지둥 일을 하다가 실수를 할 여지가 있어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민폐가 될까 미안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업무 방식이었다. 미안한척하며 본인 위주로 일을 진행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 다른 직원에게 들은 바로는 그 빌런 님이 미안하다며 무려 자정에 업무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월요일에 예정된 일이 있었다면 일찍 말해줬으면 좋았을텐데.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이 토요일에 하겠다고 말했다. 처음엔 사정을 설명하고 죄송하다고 굽신거리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한두 번 당하고 나면 간파된다. 몇 번이나 속고도 또 믿어주기엔 이미 나도 사회의 때를 탔다.
토요일 오전에 업무를 처리하고 간단히 확인 요청 메세지를 보냈다. 근데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답장이 왔는데 고맙다는 말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워낙 이런 부류가 많아 일일이 마음을 쓰는 건 에너지 낭비라서 화도 안 났다. 그런데 또 한참 있다 뜬금없이 이전에 부탁했던 A 자료는 왜 아직 확인이 안 되냐는 연락이 왔다.
...이건 선 넘지. 그 자료는 다음주에 전달해도 되는 자료였다.
사실 평일에 덜 바빴으면 하는 마음에 토요일에 A자료도 겸사겸사 작성해 두었다. 그렇게 바로 자료를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괘씸했고, 오만 방자하게 날뛰는 녀석에게 인내심이란 걸 가르치기로 했다.
최근에 훈련사 '강형욱' 아저씨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여유, 카리스마, 규칙, 인내심, 사랑으로 반려견과 함께 살기 위한 솔루션을 진행하는 걸 보며 생각했다. '직장의 빌런들도 저렇게 훈련시켜야겠다..'
직장도 결국 규칙과 경계가 필요한 곳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훈련사라고 명명하니 직장의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내가 해결해야 할 어려움 중 하나'로 느껴지며 마음이 새삼 더 강해졌다.
이 녀석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일은 월요일에 하겠다고 간결하게 답했다. 나보다 직급이 높다고 주말의 시간까지 좌지우지할 권한은 없다. 그가 인내심을 더 기르길 바랬다. 다행히 이후 더는 요청이 오지 않았다. 이제는 칭찬에도 덤덤해질 수 있는 만큼, 상대의 힐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 중요한 건 남의 급함보다 내 삶의 균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