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환상!의 짝꿍
갈기가 멋진 위엄 있는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장면을 시작으로 <톰과 제리> 에피소드의 막이 오른다. 이런 식의 오프닝은 보통 영화 시작 전에 많이 등장하는 편인데, 알고 봤더니 <톰과 제리>는 텔레비전에 상영될 목적으로 만들어진 만화가 아니라 극장용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포근한 우리 집 그리고 "내 친구"
이 만화에는 성우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배경으로 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우당탕 하는 소리만으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보통 고양이와 쥐의 싸움에서 쥐가 이긴다고 상상하기 힘들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제리는 발을 걸어 톰을 넘어 뜨리고 수염을 뽑아 버리고 심벌즈로 톰의 얼굴을 쳐서 납작하게 만든다.
꼬리가 불에 타거나 처맞고 굴러 떨어지는 아픔을 겪는 톰은 더욱 입술을 쭉 내밀고 심술궂은 표정으로 제리를 해치워 버리려고 한다. 이 정도면 죽지 않나 싶은 상처나 이빨이 아작 나는 상황도 화면만 바뀌면 금세 회복하니 그들의 상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끔은 제리가 당하는 날도 있다. 둘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우지만 희한하게도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어릴 적에는 바보 같은 톰이 늘 당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지금은 톰이 제리와 놀아주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럴까?
톰이 제리와 놀아주는 이유?
톰의 주인인 미국 백인 가족 부부는 이 귀엽고 장난기 많은 고양이에게 큰 애정을 주지 않는다. 보석을 주렁주렁 걸친 안주인 여자는 생쥐를 무서워한다. 제리가 구멍에서 튀어나온 날에 의자 위에 올라가 톰에게 제리를 잡으라며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톰은 아마 처음에 그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제리를 잡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제리와 잘 통하는 구석이 있었던 건지 톰은 늘 제리를 잡았다 놓아주고, 먹을 수 있음에도 갖고 놀기만 한다. 톰은 날쌔지만 순둥 한 고양이이다. 낭만파이면서 제리를 사랑한다.
오히려 철없는 쪽은 제리다. 가만 보면 제리는 톰을 일부러 봐주거나 관용을 베푸는 쪽이 아니다. 제리는 톰을 봐줄 수 없다.
왜? 제리는 생쥐라서 고양이 앞에서 강자가 될 수 없다. 제리는 약하고 얼간이 같이 구는 고양이 톰이 만만하고 우스워서 같이 놀 수 있어 즐겁기만 하다. 상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톰은 늘 제리를 봐주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톰은 제리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리도 그런 톰과 우정을 쌓아가고 둘은 앙숙인 듯 잉꼬인 듯 매일 웃음을 나눈다.
#클래식 맛집 #지니어스 톰
만화 속에서 톰은 가끔씩 첼로를 켜고 피아노를 친다. 지휘자로 나서기도 하고, 다락방에서 혼자 피아노 기초 책을 보고 몇 장 치더니 갑자기 흰건반을 우다다 치면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해 버리는 천재적인 면모를 보인다.
한 에피소드에서 톰은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면서 아름다운 선율로 제리를 꾀어낸다. 구멍 속에서 춤을 추며 등장한 제리를 낚아채 손에 쥐었는데, 톰의 피아노 연주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나타나 박수를 치는 분위기에 그들은 언제 또 서로 으르렁댔었냐는 듯 실과 바늘 같은 파트너가 되어 신나게 시간을 보낸다.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알게 모르게 클래식 음악은 자주 등장한다.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오케스트라의 악기 소리들과 친해지게 된다. 꼭 유명한 클래식이 아니더라도 피아노 선율과 각종 악기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가 자주 등장하는데, 가사 있는 음악보다 순수한 악기 소리덕에 <톰과 제리> 특유의 감성이 짙어진다.
클래식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는데, 거기다 포근한 그림체로 표현한 20세기 중반 미국과 귀여운 톰과 제리의 달콤 살벌한 우정까지. 새까맣게 타버린 내 마음속 동심을 다시 반짝이게 하고 싶을 때, 톰과 제리의 세상으로 퐁당 접속해 보자.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 추천
톰과 제리를 다시 보고 싶다면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 2편을 소개하니 참고해 주시면 좋을 것 같다. 유튜브에 검색해 보면 나온다.
<Jerry in Manhattan (제리, 맨해튼에 가다)>
추운 겨울날, 시골 생활이 지겨워진 제리는 벽난로 옆에서 단잠에 빠져있던 톰 옆에 편지만 남겨두고 맨해튼으로 여행을 떠난다.
도착한 맨해튼 풍경을 보면 그 당시 미국의 낭만이 느껴지는데 커다란 건물, 반들거리는 대리석부터 구두닦이, 목이 베베 꼬일 듯 높은 건물들, 멋진 조각상, 하이힐, 자동차, 거리의 화려한 불빛, 샴페인, 빈민가까지 볼 수 있다.
제리는 멋진 풍경에 마음을 뺏겨 넋을 놓고 걷다가 시골보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의 호흡을 소화하지 못하고 우여곡절의 소란에 빠지게 된다. 또한 뒷골목의 고양이들은 톰과 달리, 제리를 먹잇감으로 여기고 살벌하게 뒤쫓아 오는데...
<Are you hungry? (배고파?)>
유튜브에 해당 제목을 검색해 보면 작화가 사뭇 다른 작품들이 짜깁기 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작가가 다른 시기의 에피소드들이고 여러 개의 음식 관련 회차가 연결되어 있다.
딸기맛 푸딩을 먹고 배가 좌우로 출렁거리는 모습이나 컵케이크, 소시지, 각종 과일, 치즈 등의 삽화가 볼 만하다.
군침이 돌고 먹음직스러운 먹방을 볼 수 있는데 불독인 '스파이크'가 두툼한 돼지 뒷다리를 들고 씹는 모습과 빵과 햄을 기가 막힌 손목 스냅으로 번갈아 끼워 넣는 걸 보면 정말 잘 만든 만화라는 게 느껴진다.
이 외에도 집안에 수돗물을 콸콸 틀어서 넘치게 만든 뒤, 냉장고와 연결된 급속 냉동 코드를 바닥에 꽂아 실내를 빙상장처럼 만들어 서로를 얼렸다가 스케이트를 타고 도망갔다가, 다시 녹여서 첨벙거리는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유튜브에서 찾지 못했다.
1940년부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인 만큼, 슬랩스틱 코미디의 무궁무진한 아이디어와 톰과 제리만의 색채가 사랑스러운 만화이다.
오늘도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