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기> - 김경래 감독
김경래 감독의 단편영화 <연기>의 지민은 배우 지망생이다. 영화는 그녀가 준비하고 있는 연극의 한 독백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민의 맞은 편에는 그녀의 연기가 지루해보이는 심드렁한 표정의 보겸이 앉아 있다. 지민의 연기 선생님인 보겸은 그녀에게 금세 다른 연기를 주문한다. 이들의 연기와 주문은 오래된 선생과 제자가 주고받는 관성적인 대화처럼 보인다. 수업을 마친 뒤 지민과 보겸은 담배를 피며 서로 만나고 있는 연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겸은 2년 사귄 여자친구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지민은 집착이 심한 남자친구와 어떻게 헤어져야 할지 고민 중이다. 그순간 지민이 보겸에게 묻는다.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지민의 부탁은 바로 보겸에게 자신의 남자친구 연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과 제자라는 기존의 역할 때문일까 보겸은 지민에게 매달리는 연기를 하면서도 무릎을 끓는 일에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남자친구가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민은 자신의 남자친구는 분명 그럴 것이라며 보겸에게 정말 자신의 남자친구가 된 것처럼 실감나는 연기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때부터 지민과 보겸의 수업은 온통 지민의 헤어짐을 위한 예행 연습이 된다.
“헤어지자는 말 취소해.”
“그만해, 너 이러는 거 폭력이야.”
“지금 헤어지자는 것도 나한텐 폭력이야.”
“오, 방금 대사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남자친구 역을 대신하던 보겸은 어느 순간부터 지민보다 더 연기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이들의 연기 연습은 수업 시간을 벗어나서 길거리에서도 계속되며 어떤 날은 서로의 입장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역할을 바꿔 연습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영화의 제목인 <연기>가 지칭하는 것은 지민과 보겸이 연습하는 ‘헤어지는’ 연기인 것처럼 자연스레 인식된다. 그러나 지민이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친구와 이야기하는 한 장면은 이러한 예상을 한순간에 뒤집는다.
“잘 생겼지?”
“누군데?”
“학원 선생님”
그 사람을 만나냐는 친구의 말에 지민은 아니라면서 선생님에겐 오래된 여자친구가 있다고 대답한다. 집착이 심하다던 지민의 남자친구는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걸까? 지민의 친구는 어째서 집착이 심하다는 지민의 남자친구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어쩌면 지민에게 남자친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민은 어째서 보겸에게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의 연기를 부탁한 걸까? 그 순간 이전까지는 지민과 보겸의 앙상블처럼 여겨졌던 영화의 제목 속 연기는 지민이 보겸에게 선보이는 독백 연기가 된다. 헤어지는 과정을 연습하는 것만 같던 따듯한 표먼적 서사 속에 실은 한 여성의 깊은 욕망이 잠재했던 것이다.
수업을 마친 뒤 지민과 보겸은 함께 술을 마시고 길거리를 걷는다. 그순간 보겸이 지민에게 갑작스레 연기를 시작한다.
“우리 헤어지자.”
길거리에서 시작된 갑작스런 연기에도 불구하고 지민은 자연스레 응한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좋아하는 생겼어.”
“누군데?”
지민의 마지막 말에 보겸은 갑작스레 지민에게 입을 맞춘다.
지민의 연기를 보면서도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보겸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영화 <연기>는 제목이 의미하는 연기의 대상이 뒤바뀌는 반전과 함께 연기라는 행위가 가진 마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지민과 보겸의 연기였던 것만 같던 제목의 의미는 어느 순간부터 지민 혼자만의 연기로 변모하며 지민에게 집착하는 남자친구를 연기하던 보겸은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지민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껴버린다. 18분이라는 짧은 호흡과 흑백 화면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현실적인 연기가 돋보이는 단편영화 <연기>. 단편영화가 가진 매력은 어쩌면 이런 영화를 보고 하는 말이 아닐까.
인디매거진 숏버스 객원필진 3기 최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