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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매거진 숏버스 Mar 03. 2023

적당함의 미덕, 혹은 비인간화

영화 <보통의 감정> - 민소정 감독

흔히 인간 의식의 양대 축을 이성과 감성이라고 한다. 근대 이래 인류 역사는 감성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이성은 합리성으로도 불리는데, 막스 베버는 이 합리성에 기초한 관료제가 근대 사회의 지배적인 양식이며,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강철 우리(Iron Cage)’로 언명하기도 했다.


이른바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왔고, 그것의 한계를 비판하는 대안 사조들이 등장한 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는 합리성으로 촘촘히 구획되어있다. 삶의 여러 국면에서 사람들은 감정을 절제하고 침착하게 굴 것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절제된 감정은 작품에서 ‘보통의 감정’으로 표현된다. <보통의 감정>은 2021년 제8회 춘천SF영화제 출품작으로, 인간의 격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기계 장치가 상용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석현은 애인과의 원만한 관계 그리고 업무상에서의 능률을 위해 귀에 기계 장치를 부착한다. 그러나 석현의 여자친구 지은은 그런 그를 마뜩잖아하고, 장치를 떼 내어 바닥에 내던져버린다. 작중에서 지은은 ‘이성 독재’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 세계에서 감정의 통제는 선택이 아니다. 장치의 부착은 노사 협의에 따라 의무사항이 되고, 격렬한 분노를 느끼고 그것을 표출하는 노동자는 곧바로 해고 대상이 된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석현과 지은. 둘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발단은 지나치게 냉정해서 황량하기까지 한 회사의 풍경이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부적격자로 판단된 지은은 곧바로 퇴출되고,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들의 비정한 태도에 분노한 지은은 폭력적인 행동을 보인다. 유리로 된 디스플레이를 깨뜨리고 던진 지은의 몸엔 크고 작은 유리 조각이 박히고, 이를 본 석현이 지은을 의무실로 데려가려고 하지만, 지은은 거부한다.




 몸에서 피가 솓구치는 지은의 상태를 감안하면 당장 의무실로 가 진료를 받는게 ‘합리적’인 행위일 테지만, 지금 지은이 원하는 건 이성의 손익계산이 아니다. 지은의 돌출 행동에는 회사 사람들에 대한 울분, 남자친구에 대한 서운함과 같은 감정의 선명한 색깔들이 덧칠되어 있다. 또한 이는 소리쳐보지만 바뀌는 것 하나 없는, 매우 소극적인 형태로 발산되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영화는 기계장치에 대한 어느 부부의 인터뷰를 응시하는 석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마무리된다. 화면 속의 부부는, 기계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서로에게 큰 환상도 갖지 않고 ‘적당히’ 사랑하는, 이른바 ‘보통의 감정’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 부부와 마찬가지의 효과를 기대하고 기계장치를 구입한 석현. 그러나 작품 후반부 석현의 표정은 어둡다. 그의 허망한 눈빛은 우리에게 감정 통제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감정은 양날의 검이다. 감정의 부정적 표출은 많은 상황에서 파국적 결말을 불러온다. 그러나 동시에 감정은 인간에게 충만함과 생동감을 제공해준다. 숫자나 논리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사실 이 불가해성을 특징으로 하는 감정이라는 존재야말로 때론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포디즘부터 맥도날드화까지, 합리성의 지배로 귀결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감정의 동력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인디매거진 숏버스 객원필진 3기 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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