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디매거진 숏버스 Mar 28. 2023

포기하는 삶으로서의 '어른 되기'

영화 <소> - 이세영 감독


영화의 제목은 <소>. 그런데 영문 제목은 ‘A VEGETARIAN’이었다. ‘소’와 ‘채식주의자’라니. 의도적인 대비일까? 작중에서 손녀(세영)은 줄곧 야채를 먹는다. 야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할머니(선아)에게 왜 야채를 먹지 않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아무래도 고기보단 맛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고기를 좀처럼 먹지 않는 세영의 일터는 정육점이다. 뭔가 기이하다.



세영은 할머니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포스트잇을 통해 자신이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손녀를 사랑하는 할머니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이쁜 손녀를 ‘짜른’ 사장을 찾아가고자 한다. 차를 태워주는 친구의 도움을 등에 업은 할머니는 매우 기고만장하게 정육점을 방문한다. 그런데 가게에는 사장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앳된 얼굴을 한, 남방을 걸친 여자가 서 있다.          


선아는 대뜸 여기서 산 고기가 이상하다고 말하며 친구를 대동한 채 소위 ‘진상짓’을 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상대하는 젊은 여자는 사장이 아니다. 여자는 울먹이며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여자는 친구 대타로 오늘 하루만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인데, 친구로부터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예상을 깨는 두 할머니가 난데 없이 들어와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꼴이 된 셈이다.



사정을 듣고 미안해진 선아는 자기가 직접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보겠다며 휴대전화를 건네받는다. 그런데 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고, 기약 없는 소리만 울려댄다. 마음이 약해진 선아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가게를 나온다. 그러다가, 세영과 함께 오이를 먹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과거회상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정체는 가장 노릇을 하던 선아의 딸이자 세영의 엄마. 현재는 돌연 사라진 상태이다. 엄마가 일했던 곳은 동네의 어느 고깃집. 이 역시 세영의 옛 일터만큼이나 아이러니하다.    



이어지는 신에서 세영은 엄마가 일했던 고깃집에 찾아가 혼자 고기를 구워 먹는다. 비록 정육점에서 일했지만 채식주의자(영어 제목명이기도 하다.)였던 세영이 고기를 먹다니. 그것은 신념의 포기다. ‘R.E.M.’의 ‘Losing My Religion’이란 노래가 떠오르기도 한다. 보통 신념의 포기는 삶의 결정적인 국면에서 이뤄지는데, 영화는 그런 극적인 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무미건조한 나날들을 화면에 담아낼 뿐이다.



자기 신념에 반하는 일을 하고 마침내 신념을 버리기까지 하는 일련의 과정은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은유로 느껴졌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은 어른이 되는 일을 무척이나 장황하고 거창하게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반짝 빛나던 꿈을 포기하는 것, 지난한 삶에 찌들어 몸과 마음에 주름살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 그래서 결국 남들과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른됨이란 곧 포기다.



인디매거진 숏버스 객원필진 3기 최정민

작가의 이전글 언젠가 설명을 얻게 되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