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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매거진 숏버스 Feb 17. 2023

절박함의 굴레에 빠져

영화 <전전날> - 박광호 감독

여기 되는 것 하나 없는 무명 배우 승제가 있다. 승제는 단편이지만 첫 주연을 맡게 될 생각에 기대에 부풀어 있다. 촬영도 채 다 하기 전에 완전히 망해버리기 전까진. 


영화 <전전날> 중


승제 곁에는 도무지 제대로 해 보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다. 감독은 명확한 연출 의도도 없이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며, 상대 배우는 자신의 역할에 불평불만이 가득해 시나리오에 딴지를 건다. 매끄럽지 못한 촬영에 카메라 감독도 툴툴댄다. 승제는 상대 배우를 달래도 보고, 뒤집어진 각본에 맞는 캐스팅을 위해 무릎도 꿇었다. 심지어는 이 촬영을 위해 상업 영화 출연 제안도 거절했다.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자신의 배역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승제가 크게 화를 낸다. 분명 절박했고 노력했는데, 아무것도 따라주질 않는다.


영화 <전전날> 중


영화에 출연하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승제가 분노에 차 광수에게 소리치는 말은, 왜 자신이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항변이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대본 작업이나 캐스팅에 노력했는데, 창피한 경험도 공유하고 엎어진 대본에 맞는 배우를 찾으려고 자존심까지 다 버렸는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승제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절박함이 문제의 원흉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첫 주연작이 되어줄 이 영화를 꼭 완성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에 감독의 명백한 무능함에도 손쓰지 못했고, 불안한 촬영 상황을 알았음에도 상업 영화 출연의 기회를 저버렸으며, 종국에는 일 년이나 준비해온 각본이 엎어지는 것도 막지 못했다. 


영화 <전전날> 중


승제가 절박함에 대해 모르는 게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건 절박한 것은 자기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팍팍한 영화판에서 처절하게 노력하는 것은 미영이나 광수도 마찬가지다. 승제가 영화에 꼭 출연해야 한다는 마음에 상대 배우 미영의 역할이 없어지는 것을 방관한 것처럼, 납득할 수 있는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삼촌에게 각본 검토를 부탁하게 만든 건 미영의 절박함이다. 또 일 년 넘게 함께 노력해왔던 승제를 저버리고서라도 미영 삼촌이 조언해준 방향으로 촬영하기로 결정한 건 광수의 절박함이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절박했는데 왜 내 뜻대로 안 되는 거냐는 불평은 절박함이 만든 승제의 좁은 시야 때문이다. 


영화 <전전날> 중


영화의 시작과 끝에 매우 명백하게 제시되는 ‘그리스인 조르바’ 레퍼런스는 승제의 이런 절박함을 꼬집는 것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런 초인의 마음가짐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서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잘못될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승제와 너무도 대조되는 모습이다.


영화 <전전날> 중


승제는 아마 이 모든 게 촬영 전전날부터 꼬여버렸다고 한탄할 테지만, 아마 ‘전전날’이란 배우로서의 커리어에 절박해진 시점부터 꽤 오랜 시간 승제를 따라다녔을 것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수록 더 절박해지고, 그 절박함이 승제를 더욱 구석으로 내몬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컷 사인이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먼 거리의 광수를 돌아보는 얼굴을 보면, 승제는 아마 이 굴레를 금방 벗어나진 못할 것 같다.



인디매거진 숏버스 객원필진 3기 제갈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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