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파리

3-4,5,6,7

by 강정민

3-4


중남미의 뒷골목. 좁은 골목 안, 디에고가 벽에 등을 기대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손에는 낡은 주스 캔이 들려 있고, 먼지와 핏자국이 뒤섞인 콘크리트 바닥을 발끝으로 천천히 긁으며 불안한 눈빛으로 골목 저편의 그림자를 조용히 좇고 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디에고는 형의 부탁으로 ‘전달책’이 되었다.

“그냥 가방만 들고 오는 거야. 별거 아냐.”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심부름이 아니었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었고, 그 일을 맡았던 몇몇 소년들은 다음 날부터 다시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디에고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그를 따라오다가 하나둘 총으로 변했다. 그때, 누군가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가방 안엔 네 목숨도 들어 있어.”

디에고는 갑자기 숨이 막혀 깨어났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고, 그는 한참 동안 그 가방을 바라봤다.

그것은 단순한 심부름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도 그 안에 함께 실려 가고 있는 건 아닐까. 가방을 짊어진 순간부터, 그는 누군가의 손에 넘겨진 셈이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그것이 마약 운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형은 말해주지 않았고, 디에고도 묻지 않았다. 이 세계에선 질문보다 눈치가 빨라야 살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경찰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불심검문을 당했다.

“이건 제 숙제예요. 형이 기다리고 있어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한 디에고를 남자는 흘겨보다 그냥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날 밤, 형은 사라졌고, 형이 머물던 집엔 더 이상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디에고는 오직 자기 자신만 믿기로 했다. 형도, 친구도, 어른도 믿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거래의 법칙’을 익혀갔다. 가장 위험한 구역에서 가장 빠르게 빠져나오는 법, 눈에 띠지 않게 무리를 스치는 법, 낯선 기척에 뒤돌아보지 않는 법을 배웠다.

디에고는 알고 있었다.

“먼저 치지 않으면, 먼저 당한다.”

“웃고 있는 놈이 가장 위험하다.”

“누구든 널 팔 수 있다.”

말수는 점점 줄었고, 눈빛은 무뎌졌다. 그러나 기억력은 날카로워졌고, 거리의 규칙은 그의 머릿속에 명확히 정리되었다.

위험한 구역에서 피해야 할 옷의 색,

돈이 오가는 순간 가장 경계해야 할 표정,

소리보다 먼저 읽어야 할 발걸음의 리듬.

디에고는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하나씩 갖춰가고 있었다.

몸, 눈, 판단력, 그리고 주저 없는 결단.

그는 웃지 않았다.

그러나 굶지도 않았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지는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3-5


매사추세츠의 연구소 캠퍼스. 이른 아침, 낙엽이 흩날리는 길을 따라 케빈이 혼자 걷고 있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 같은 속도로 강의실로 향했다.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인사하지 않았다. 그가 관심 있는 건 오직 문제와 해답뿐이었다.

열한 살 무렵, 케빈은 자율 진화 알고리즘에 대한 첫 번째 논문을 완성했다. 그는 논리와 패턴의 세계에 몰두했고, 연구소의 누구도 그를 아이로 취급하지 않았다. 교수들은 그의 수식을 검토했고, 논문 심사위원은 그의 어휘 선택에 감탄했다.


그러나 케빈은 여전히 혼자였다. 기숙사에서 식사를 할 때면, 다른 아이들은 웃으며 대화를 나눴지만 그는 식판의 음식 배치가 왜 비대칭인지 관찰했다. 웃는 얼굴의 근육 움직임, 우유를 쏟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행위의 목적, 그는 모든 것을 분석했다.


그에게 ‘사는 것’은 감각이 아닌 논리적 해석이었다.

“기초 에너지 섭취 후, 다음 과업 수행.”

그는 하루를 그렇게 나눴고, 일관성과 효율을 중시했다. 세탁은 수요일, 정리는 금요일, 수면은 정확히 6시간 30분. 감정은 예측할 수 없는 변수였고, 변수는 제거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소 식당에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후배가 우연히 그의 노트북에 실험 데이터를 실수로 덮어쓴 것이다. 케빈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왜 실수했죠?”

그 말에 후배는 눈물을 흘렸고, 케빈은 당황했다.

‘왜 우는 거지?’

그는 그날 밤, 울음이라는 감정 반응에 대해 2시간 넘게 검색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노트북 백업 폴더가 자동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수는 복구 가능. 감정은 불필요. 그러나… 복잡하다.”


그날 밤, 백업 파일을 확인한 후, 케빈은 자신의 책상 옆 메모장에서 이상한 글귀를 발견했다. 자신이 쓴 적이 없는 문장이었다.

“기억은 복구된다. 감정은 남는다.”

그는 당황했지만 삭제하지 않았다. 그 문장을 며칠 동안 곱씹었다. 그 문장을 누가 썼을까. 혹시 내가 아니었다면... 누가 내 방에 들어왔던 걸까?

처음으로, 논리를 초과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이름 붙일 수 없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그날 이후, 케빈은 ‘계산되지 않는 것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강의실 뒤편 나무 결 사이에 박힌 손톱 자국, 복도에 쌓인 낙서들, 그리고 누군가가 실수했을 때 들리는 미안하다는 말의 빈도.

그는 여전히 이해하려고만 할 뿐, 공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세상은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케빈은 그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여전히 정서적 연결은 없었지만, 세상을 구성하는 법칙이 단지 수식만은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깨달음은, 그를 ‘고립된 천재’에서 ‘세상과의 최소한의 접촉을 시작한 존재’로 바꾸어놓았다.


3-6


중국 후난성의 공장 마을. 하늘은 늘 희뿌연 먼지로 가려져 있었고, 공장의 사이렌 소리가 아침을 깨우는 알람이었다. 린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줄지어 학교로 향했다. 동일한 복장, 동일한 걸음, 동일한 노래. 그녀는 그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가는 것 같았다.

“질문은 수업이 끝난 후에.”

“생각보다 정답이 중요하다.”

“국가를 위하여, 가문을 위하여.”

교실 벽의 붉은 표어는 반복과 침묵을 강요했다. 교사의 말은 외워야 했고, 시험 점수는 인격의 점수였다.


린은 누구보다 조용했고, 누구보다 성실했다. 그녀는 규칙을 어기지 않았고,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면, 그녀는 달라졌다. 책상 아래 숨겨둔 종이를 꺼내, 작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글을 써내려갔다.

“나는 누구인가.”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가.”

“슬픔은 가만히 써두면 사라질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고, 그 종이들은 매주 소각장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종이를 꺼냈고, 그 안에 또 다른 린이 존재했다.


열네 살 무렵, 린은 수학 경시대회에 선발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능력’을 증명하는 첫 번째 기회였다. 학교는 그녀에게 새 교복을 지급했고, 마을 방송에서는 “가문의 영광”이라는 표현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성공은 순응의 결과이며, 자신은 이 체제 안에서 ‘가치 있는 아이’가 되었다는 것을.


시험이 끝난 날 밤, 린은 소각장을 지나다가 자신의 시 한 장이 불길 속에서 타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복종 속에 숨은 언어.”

“이름 없는 내가, 몰래 남긴 문장.”

그 불꽃을 바라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불꽃 속에서 글자가 하나하나 피어오르는 듯한 환상이 스쳤다. 자신이 썼던 문장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라지지 마. 너는 지금, 있다.”

그 음성은 분명 바람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대답’이라 느꼈다.


그날 이후, 린은 더 이상 시를 버리지 않았다. 책 속, 옷 속, 베개 밑에 단단히 감춰 두었다. 그것은 아무도 읽지 못할 문장이었지만, 세상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소유한 것이었다. 린은 이제 질문하지 않아도 정답을 맞추는 아이, 하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는 아이였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고 있었다.


3-7


붉은 바람이 불어오는 새벽. 마리사는 물동이를 이고 우물길을 걷고 있었다. 사헬 지대의 땅은 갈라지고 있었고, 하늘은 바람과 모래로 희미했다. 그 길은 날마다 같았고, 말은 없었으며, 오직 침묵과 순종만이 허용되었다.


열세 살이 되던 해, 결혼 얘기가 본격적으로 오갔다. 신랑은 마을 북쪽 부족 출신의 열다섯 살 소년. 가축이 몇 마리인지, 물이 얼마나 있는지, 결혼의 조건은 모두 가족들이 정했다.

“너는 물을 길어오고, 아이를 낳고, 남편에게 복종하면 돼.”

어머니의 말은 평온했고, 할머니는 마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나 마리사는 그 말이 끝날 때마다 속으로 작은 질문을 품었다.

“왜 나는 물어볼 수 없지?”

“나는 무엇을 원해도 되는 걸까?”

“하늘은 왜, 날마다 다르게 생겼지?”

그녀는 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발끝을 보며 일했지만, 마리사는 구름의 움직임, 별의 위치, 바람의 방향을 느끼며 걷는 아이였다.


어느 날, 마리사는 마을에 도착한 구호단체의 트럭을 보았다. 그곳에선 책을 나눠주고 있었다. 수많은 책 더미 중, 낡고 찢긴 작은 책 한 권에 손이 갔다. ‘왜인지 모르게, 이 책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멀리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책을 가슴에 품었다. 그 새는 왜 그때 날았을까. 나를 본 것 같았다. 그 책이, 이후 그녀가 쓴 첫 문장을 열어줄 열쇠가 될 줄은 아직 몰랐다.


그날 밤, 마리사는 촛불 아래에서 그 책 속 반복되는 기호들을 흉내 내어 종이에 옮겨 적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본 글자들이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그녀의 방에서 그 종이를 발견했다.

“이건 누구 허락 받고 쓴 거냐?”

마리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뺨이 붉게 부어올랐고, 손등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종이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작은 글씨로, 더 얇은 종이에, 더 깊은 곳에 숨겨

매일 밤마다 한 글자씩 써 내려갔다.

그녀는 여전히 밥을 짓고, 물을 긷고, 순종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그 틈 사이, 자기만의 언어로 세상을 설명하려 애썼다. 그녀가 쓴 첫 문장은 틀린 문법과 어색한 글씨로 쓰인 것이었다.

“I want… to know.”

그 문장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그것을 적는 순간,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