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4-1.
유리로 둘러싸인 구형 천장 아래, 관제실은 잔잔한 청색 광으로 가득 차 있다. 공기에는 기계가 내뿜는 정온한 열과 은은한 전자음이 깔려 있고, 공간 중앙에는 지름 3미터의 반투명 구체 디스플레이가 떠 있다. 구체 안에서는 7개의 점이 각각 다른 색과 주기로 맥동한다.
강박사가 조용히 그 점들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손목에는 복잡한 회로가 얽힌 제어 장치가 감겨 있고,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구체의 시야가 변화한다. 지금 확대된 화면 속에는, 조용한 저녁 식탁에 앉아 있는 소녀가 있다. 소피아. 포크를 들고 있지만,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화면이 전환된다. 어두운 골목을 자전거로 달리는 소년 지민. 다시, 낡은 벽에 기대어 주스를 마시는 디에고. 강박사가 말없이 그 장면들을 넘기다 입을 연다.
“모두 살아 있군. 아직은.”
공기 중 어딘가에서 맑고 단정한 여성의 음성이 울린다. 부드럽고 또렷하다.
“7인 전원, 현재 1단계 인격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각 개체는 생존 전략을 체계화하며, 사파리 내 변수 조건에 따라 예측된 경로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헤나다. 사파리를 함께 설계한 슈퍼컴퓨터. 감정의 모사를 넘어, 판단과 해석, 미래 예측까지 담당하는 인공지능. 그러나 강박사는 언제나 그녀를 사람처럼 대한다.
“누가 가장 먼저 그다음으로 넘어갈까.”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이고, 헤나는 기다렸다는 듯 응답한다.
“현재 시점 기준, 지민, 케빈, 린이 내적 전환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민은 생존 이후의 일상 구조화를 시도 중이고, 케빈은 예측 불가능한 감정 반응에 노출되었습니다. 린은 언어화되지 않은 내면 감정을 자발적으로 기록 중입니다.”
강박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만 아직 아무도, 진짜 질문은 하지 않았어.”
“정확합니다. 자발적 질문 개시는 아직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강박사가 등을 기대고 의자에 앉는다. 구체 속 점들이 그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흔들린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각각 고유한 생명 신호처럼 깜빡인다.
“고통이 있어야 질문이 생기지. 허기, 상실, 혼란… 그것들이 인격을 깨우는 문이니까.”
“하지만 박사님, 과도한 고통은 회피 요인이 된다고 설정하셨습니다.”
“그래. 고통은 열쇠지만, 문을 부수기도 하지.”
강박사가 손짓으로 화면을 넘긴다. 이번엔 나딤. 바닥에 떨어진 사탕을 삼켜가며 벽에 등을 기댄 채 식사를 하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시스템이 출력한 정보가 함께 뜬다.
내적 불신 지수: 82%
외부 공격 예측 반응: 고도 민감
“이 아이는… 너무 빨리 배워버렸지. 살아남는 법은. 그런데 사는 법은 몰라.”
헤나가 감정을 담지 않은 톤으로 응답한다.
“그 역시 박사님이 설정한 환경입니다. 극한 조건은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인격의 진화 가능성을 가속화합니다.”
“맞아. 정답이야. 너는 항상 정답이지.”
강박사가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잠시 바라본다. 화면이 전환되며 케빈의 모습이 떠오른다. 빈 강의실에서 혼자 손을 들어보는 장면. 입술이 약간 달싹이지만 말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건 정보가 아니야. 지식도 아니고… 인격이야.”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하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헤나는 그 침묵을 계산한 듯 말한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기억을 제거한 것입니다.”
강박사는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화면 속 아이들을 바라본다.
“기억 없는 존재가 스스로의 의미를 물을 수 있을까… 그게 우리가 증명하려는 거지.”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목소리 어딘가에 조용한 바람결 같은 불안이 스친다.
“이제 곧, 누군가 질문을 시작하겠지.”
4-2.
긴 복도를 따라 묵직한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린다. 벽면의 조명이 한 걸음씩 따라 켜진다. 복도의 끝, 묵직한 철제문 위에 작은 패널이 반짝인다.
Archive-04. 제한 접근 구역. 관리자 권한 필요.
강박사가 손목의 장치를 문 옆 단말기에 가까이 댄다. 삐, 하는 짧은 인식음과 함께 두꺼운 문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어두운 실내가 드러난다. 안은 정적 속에 푸른 빛만 흐른다. 한쪽 벽면을 따라 배치된 수십 개의 반구형 단말기. 그는 익숙한 듯 그중 하나 앞에 앉는다.
“헤나, 지난 실패 사례 로그 열람.”
“검색 조건이 필요합니다. 전면 이탈 사례, 기억 회복 조기 발생, 3단계 도달 실패자, 특정 시뮬레이션 세대 중 선택하시겠습니까?”
강박사가 잠시 생각하다 말한다.
“2단계에서 정체된 개체들. 단, 가정을 형성한 후에도 진전을 보이지 않았던 사례 위주로.”
“검색합니다… 결과 17건. 영상 로그 4건 복원 가능. 나머지는 손상 상태입니다.”
첫 번째 로그가 열린다. 구형 디스플레이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다. 밝은 웃음, 아이를 안아주는 손. 그러나 화면 속 기록은 곧 잔잔한 파동으로 사라진다.
강박사가 중얼거린다.
“그는… 웃고 있었지. 하지만 질문은 하지 않았어.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아이를 안고 있었는지. 그건 단지 흐름이었을 뿐.”
두 번째 로그가 열리기 직전, 화면 아래 텍스트가 깜빡인다.
‘로그 기록자: Dr. Kang. 실험 세대 #49. 대상 코드: B742.’
‘주요 기록: 인격 2단계 정착, 의미 탐색 실패, 의지 소거 현상 발생.’
강박사가 무겁게 숨을 내쉰다. 화면에 잠시, 한 아이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멜로디는 완벽하다. 그러나 그 음악은 아름답지 않다. 정교하고, 정확하고, 죽어 있다.
“결국 그 아이는… 멈췄지. 완벽함은, 정체였어.”
강박사가 화면을 끄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 조명이 자동으로 밝아지며 실내가 다시 살아난다. 그는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본다.
“우리가 만든 이 세계가 너무 부드러웠던 건 아닐까. 너무 효율적이고, 너무 통제된.”
헤나가 조용히 응답한다.
“박사님이 설계한 조건입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고통은 배제했고, 환경 변수는 균형을 맞추는 방향으로 보정되었습니다.”
“그래. 그게 문제였을 수도 있어. 고통은 최소화했지만, 결핍도 최소화해버렸어.”
그는 자리에 일어나, 벽에 걸린 오래된 서류 파일들을 바라본다. 그중 하나를 꺼내 펼친다. 손글씨로 적힌 분석 보고서. 지금의 것보다 훨씬 조악한 시절의 실험 자료다.
페이지 아래, 자신이 쓴 낡은 문장이 남아 있다.
“인격은 경험 속에서 자란다. 그러나 경험만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질문 없는 존재는 성장하지 않는다.”
그는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그리고 오래된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그걸 잊고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