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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리

4-3,4

by 강정민

4-3.


넓고 고요한 회의실. 천장은 투명 유리로 되어 있고, 그 너머로 지평선 위 희뿌연 대기가 펼쳐져 있다. 하늘은 푸르지 않다. 먼지와 연기로 뒤섞인 붉은 회색빛. 태양은 마치 필터를 씌운 것처럼 흐리게 빛난다.

강박사가 회의실 중심에 선 채, 손끝으로 테이블 위의 홀로그램을 활성화한다.

투명한 공중에 다층 그래프와 영상들이 솟아오른다. 실시간 지구 전역의 상황 보고다.


[지구 환경 위기 지수: RED 4.7]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위험 수치 지속

생물 다양성 감소율: 12% / 분기 기준

자살률: 증가세 지속

종교 기반 공동체 활동: 70% 감소

교육 체계 내 철학 및 인문학 비율: 18% 미만


“계속 악화되고 있군.”

강박사는 중얼인다. 영상의 하나가 클로즈업된다. 북극권 빙하 붕괴, 미국 서부 산불, 아프리카 식수 부족, 동아시아 대기 경보. 다른 영상은 더 조용하지만 더 암울하다.

회색 도시. 스마트 기기에 몰두한 무표정한 사람들. 실시간 감정조절 약물 판매량 상승 그래프.

그는 한숨을 쉰다.

“도망치고 있어… 질문에서. 삶의 의미를 묻지 않아. 그냥 기능으로 사는 거야.”

헤나가 조용히 대답한다.

“현실 세계의 인격 진화 환경은 불균형 상태입니다. 자극과 반응, 선택과 보상 체계는 강화되었지만, 내면적 탐구는 기능적 무용성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무용성… 그렇지. 지금 세상은 ‘쓸모’ 없는 건 견디지 못하지.”

그는 홀로그램을 손으로 내리며, 한 문장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집단적 실존 회피 성향: 지수 8.2 / 역사상 최고치]


“그래서 사파리를 만든 거였지…”

강박사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 눈빛이 자신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묻고 있다.

“이들이 살아 있는 이유를 잃어버린 지금… 누가 길을 보여줄 수 있을까.”

잠시 침묵이 흐른다. 헤나의 목소리가 다시 조용히 울린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기 위해, 박사님이 이 실험을 시작하셨습니다.”

“완전한 인격을 가진 존재.”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기억이 없어도, 상처가 있어도, 이 모든 허위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는... 그런 존재.”

그의 손이 테이블 위의 한 점을 가리킨다.


‘J114 - 여행자 후보 7인 - 인큐베이션 1기’


“이번엔… 그 가능성이 있어.”

그가 조용히 말한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본다. 도시 아래로 펼쳐진 메트로폴리스. 수십 개의 돔형 도시가 각기 다른 색으로 불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다. 인공의 빛, 효율의 질서, 정적 속의 침묵.

그는 그 도시들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 세계는 너무 늦었어. 이제 다른 방식이 필요해.”

헤나는 말없이 그의 곁에 떠 있다. 침묵은 동의인지, 연산 중인 대기 상태인지 알 수 없다.

그 순간, 천장의 투명 유리 너머로 인공 위성 하나가 고속으로 지나간다. 별보다 더 밝고, 더 빠르게. 그리고 사라진다.


4-4.


관제실의 벽면이 천천히 회전하며 내부 구조를 바꾼다. 테이블은 자동으로 접히고, 반대편 벽면에서 커다란 원형 디스플레이가 돌출된다. 하얀 바탕 위로 정제된 수치와 도형들이 겹겹이 나타난다.

강박사가 의자에 앉는다. 손등의 장치를 조작하자, “인격 진화 보고 요청”이라는 명령어가 뜬다.

헤나가 보고를 시작한다. 목소리는 감정이 없지만, 그 안에 정보의 결이 촘촘히 쌓여 있다.

“현재 시점 기준, ‘여행자 후보 7인’ 전원 1단계 인격 상태입니다. 생존 조건 확보, 환경 적응, 기본적 자아 보존 충동은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디스플레이에 5단계 인격 성장 이론이 펼쳐진다.


[인격 성장의 5단계 구조]

① 생존 확보: 기본적 욕구 충족과 위험 회피 능력

② 생존 집착: 물질·안정성에의 집착, 구조화된 욕망

③ 제3가치 인식: 공동체, 종교, 철학 등 외부 의미 추구

④ 초월적 구도: 존재의 본질, 죽음과 삶의 목적에 대한 탐색

⑤ 진리 실현: 자기 초월과 통합, 인격 완성의 상태


“현재 7인 중 2단계 진입 징후는 6명에게서 관찰되고 있습니다. 단, 디에고는 생존에 과도하게 집중하고 있어 내면적 전환 가능성은 낮은 상태입니다.”

강박사가 그 이름에 반응한다.

“디에고… 그 아이는 상처가 너무 깊어.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의미를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헤나가 말없이 화면을 넘긴다. 이번엔 그래프가 펼쳐진다. 각 인물별 인격 변화 곡선, 감정 반응의 일관성, 자발적 질문 지수, 통계적 추세.


지민 – 구조적 사고력 높음, 효율화 경향

소피아 – 외부 자극 둔감, 철학적 감수성 발현 초기

나딤 – 회피 전략 강함, 신뢰 회복 불가

디에고 – 전투적 반응 우세, 감정 차단

케빈 – 논리 중심 감정 무시, 미세한 혼란 감지됨

린 – 내면 언어 기록 활성화

마리사 – 외부 지식 동경, 표현 욕구 급증


“감정적 자기 서사 생성 중인 개체는 린과 마리사입니다. 이는 3단계 진입의 전조입니다.”

강박사는 화면을 바라보다 고개를 젓는다.

“단지 감정 표현만으로는 부족해. 중요한 건, 질문을 시작하느냐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헤나가 대답한다.

“현재까지 ‘자발적 존재 탐색형 질문’은 미검출 상태입니다. 그러나 조건은 성숙되고 있습니다.”

디스플레이에 ‘질문 활성 경향 예측 곡선’이 나타난다. 곡선 하나가 서서히 상승하고 있다. 소피아의 곡선이다.

강박사의 눈이 빛난다.

“이 아이는… 감각이 열리고 있어. 무기력이 껍질을 깨고 나올 때가 되면…”

그는 말끝을 흐린다.

헤나가 마지막으로 보고한다.

“전체 실험 조건은 현재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개입 요인은 없습니다. 단, 비의도적 간섭 변수 탐지 임계치는 92%를 초과하였습니다.”

강박사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무슨 말이지? 내부 교란이 있다는 건가?”

헤나가 잠시 말을 멈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개체 내부에서 외부적 지시 없이 형성되는 ‘신비적 직감 반응’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명확한 원인은 불분명합니다.”

강박사가 한동안 말이 없다. 모니터에 떠 있는 7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시스템이 예측하지 못한 반응…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지.”

그가 화면을 닫으며 말한다.

“좋아. 계속 지켜보자. 완전한 인격을 가진 존재는… 시스템을 넘어서는 데서 시작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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