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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리

3-1,2,3

by 강정민

3-1.


서울 외곽의 반지하 방은 여전히 축축했다. 지민은 어느새 키가 자라, 창문 너머 골목길 전봇대의 꼭대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겨울이면 유리창에 김이 서렸고, 여름이면 벌레들이 틈새로 기어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축축한 공기처럼, 바뀌지 않는 것들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중학생이 되던 해, 엄마는 허리를 다쳐 일을 쉬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민은 새벽마다 우유 배달을 나갔다. 하늘이 아직 어둑할 때, 그는 자전거 바구니에 우유를 싣고 골목을 달렸다. 겨울엔 손이 얼었고, 비 오는 날엔 자주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배달을 거르지 않았다. 누군가의 식탁 위에 놓인 하얀 병 하나가 그에겐 점심값이었고, 전기세의 한 조각이었으며, 하루를 버티는 증표였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그의 형편을 몰랐다. 지민은 늘 단정했고, 숙제를 빠뜨리지 않았으며, 시험 성적도 평균 이상이었다. 선생님은 그를 "성실한 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쉬는 시간마다, 그는 매점 뒤편을 한 바퀴 돌았다. 때로는 포장지 속에 남겨진 조각 하나가, 그의 점심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날, 급식이 끝난 교실. 친구들이 떠난 자리에 반쯤 남은 달걀이 조용히 식어 있었다. 지민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누가 볼까 두려웠지만, 그보다 배고픔이 더 컸다.


그날 밤, 지민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푸른 교실. 비어 있는 책상 위에 달걀프라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한 아이가 나타나 조용히 말했다. “넌 잘하고 있어. 배고픔은 잘못이 아니야.” 잠에서 깬 지민은 땀이 흠뻑 젖은 손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지민은 더 이상 수치를 느끼지 않았다. 사는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야. 그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때부터 그는 모든 것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돈, 시간, 열량, 거리, 표정, 눈빛. 세상은 감정이 아니라 계산으로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래야 손해 보지 않는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배고프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자신의 하루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3-2.


흙먼지로 가득한 골목에 햇빛 한 줄기가 내리꽂혔다. 나딤은 그늘진 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날도 배급소 앞에 긴 줄이 늘어섰고, 사람들이 서로를 밀쳐냈다. 쌀 한 포대, 통조림 하나, 분유 한 통.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발을 밟고,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부었다.


나딤은 싸우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줄의 틈을 읽고, 관리자의 시선을 피하고, 가장 늦게 들어온 사람 옆에 조용히 섰다. 그리고는 언제나 딱 필요한 만큼만 집어 들었다. 너무 많으면 의심을 샀고, 너무 적으면 굶어야 했다.


그는 형에게 배웠다. ‘눈에 띄지 마. 적도 아군도 만들지 마. 누구도 믿지 마.’ 형은 늘 그렇게 말했고, 며칠 전, 결국 총에 맞았다. 누가 쐈는지 모른다. 묻지도 않았다. 이곳에선 질문이 목숨보다 비쌌다. 형이 쓰던 낡은 샌들, 허리에 찬 작은 천 주머니, 그리고 늘 가지고 다니던 마른 빵 조각. 그것이 이제 나딤의 것이 되었다. 그는 형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배고플 땐 잘린 철조망 틈으로 구호물자를 훔쳤고, 잠이 올 땐 무너진 벽 틈에 몸을 숨겼다.


어느 날, 그는 길가에 쓰러진 병사의 주머니에서 작은 물병과 반쯤 녹아 있는 사탕 하나를 꺼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가 망설이고 있을 때, 귓가에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먹어. 넌 아직 아이야.” 돌아본 곳엔 아무도 없었다. 나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사탕을 입에 넣었다. 달았다. 단맛이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나딤은 어느새 자신만의 생존 규칙을 갖게 되었다. ① 배급일은 달력 대신 총소리로 기억한다. ② 사람을 볼 땐 얼굴보다 손과 주머니를 먼저 본다. ③ 물은 나누지 않는다. ④ 죽은 자는 안타까운 존재가 아니라 자원이다. 그는 이제 살아남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죄책감도, 눈물도 사치였다. “살아 있는 게 이긴 거야.” 그 말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진리였다.


그날 밤, 나딤은 쓰러진 건물 틈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허기를 채운 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잿빛 하늘 아래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일은 누구 차례일까.”


3-3.


파리 7구, 정원에 흰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봄날. 소피아는 방 안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졌지만, 그녀는 커튼을 치고 책상에 앉았다. 화려한 드레스 대신 회색 니트를 입고, 새로 산 노트에 단어 하나를 적었다. “무엇을 원하나요?”


그 문장은 전날 심리 수업에서 받은 과제였다. 소피아는 그 질문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녀는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필요한 것은 항상 먼저 주어졌다. 식사, 옷, 책, 장난감, 수영 강습, 피아노 레슨.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부모는 모든 것을 준비했고,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갈망하지 않았다.


열여섯이 되던 해, 소피아는 달라진 자신을 느꼈다. 정찬의 맛이 예전 같지 않았고, 친구들과의 대화는 허공에 맴돌았다. 어느 날, 파티에서 돌아오던 차 안,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 그 질문은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돌아왔고, 그날 이후 그녀는 아침마다 혼자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다.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루는 길고양이를 따라 걷다가 좁은 골목에서 작은 서점을 발견했다. 거기서 처음, ‘철학’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왜 사는가』, 『욕망의 구조』, 『비존재에 관하여』...


책장을 넘기던 손끝에, 이상하게도 손이 멈춘 한 문장이 있었다. “너는 스스로를 모른다.” 그 문장이 마치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 페이지를 다시 들춰보다, 책을 조용히 품에 넣었다. 왜인지, 그 문장을 지나칠 수 없었다.


침대 옆 스탠드 불빛 아래, 소피아가 책을 쏘아 보고 있다. “고통이 없다면 기쁨도 없다.” 이상했다. 그녀의 삶은 고통도, 기쁨도 없이 평탄했다. 그러나 그 문장을 읽고 난 날, 소피아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무언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알고 싶었다. 왜 사는지, 왜 원하는지, 왜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그것은 아직 대답 없는 물음이었지만, 소피아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무기력의 껍질 아래,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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