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여성 성장기-자서전1부2장
시간을 거슬러 기억해보니 저는 마음먹은 것을 쟁취하는 야생성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1964년 동짓날에 태어난 저는 여덟 살이 되는 해에 입학해야 했지만, 아버지가 추위를 피해 이듬해 3월에 출생 신고를 하는 바람에 주민등록상으론 1965년생이 되었습니다. 당시 입학 기준일이었던 2월 28일을 넘겨버린 것이죠. 하지만 학교에 가고 싶다는 제 의지는 굳건했습니다. 입학식 날, 나이 제한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친구 2명은 집으로 갔지만 저는 끝까지 버텨 입학했습니다.
내 마음대로 콘트롤 할 수 없던 몸의 흑역사
그렇게 쟁취한 학교생활이었지만, 국민학교 시절은 제게 그리 찬란하기만 한 기억은 아닙니다. 오히려 "검은 안개"처럼 자욱한 수치심과 고통이 뒤섞인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타고난 '몸치'와 '음치'였습니다.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던 제게, 음악 시간과 운동회는 축제가 아닌 혹독한 고문이었습니다. 가슴에 코를 닦아 번들거리는 하얀 손수건을 매달고 입학해서, 6년 내내 똑같은 37명의 얼굴과 부대끼며 살아야 했던 시골 학교. 그 폐쇄적인 공간에서 제 약점은 숨길 곳이 없었습니다.
가장 아픈 기억은 운동회 날의 사고입니다.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기마전과 매스게임이 한창이던 운동장 한복판에서, 저는 얇은 운동복 바지에 오줌을 싸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창피해서 일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바닥이 마를 때까지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제 약한 오줌보는 잊을만하면 저를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이훈강 시인의 시처럼, '운동회 날 배고픔과 서러움을 달래려 수돗가에서 물만 들이켜던 아이'의 우울함이 제게도 깊게 배어 있었습니다.
신체적인 고통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시골 아이들은 누구나 부스럼을 달고 살았습니다. 산과 들로 뛰어 다녀 가시에 다리와 팔이 긁혀 피가 가실 날이 없었고, 특히 머리에 난 부스럼은 잘 낫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통풍이 안 된다며 제 뒷머리를 남자아이처럼 빡빡 밀어버리셨습니다. 그 흉한 머리를 가리려 벙거지 모자를 쓰고 학교에 다니던 소녀의 마음은 얼마나 위축되어 있었을까요. 거기에 옷 솔기 사이마다 득실대던 머릿니와 서캐는 또 어찌나 지독했는지 모릅니다. 학교에서 독성 살충제인 흰 가루의 DDT를 머리에 뿌려대면, 아이들은 모두 백발이 된 채 서로를 보며 낄낄댔습니다. 그런 지저분하고 남루한 풍경이 제 유년의 배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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