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칸에 가겠다고요, 제가요.

by 데일리 우글

직장인 6년 차, 동료들과 얘기해 보면 비슷한 고민과 불안을 공유해. 내 직업과 직장은 대체 불가능한 걸까? 회사 바깥의 나는 뭘까. 아니, 회사 안에서 자리를 잡을 만큼의 존재감은 있을까. 엄청 특출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기자의 일에는 운과 실력이 다 필요한 거니까.


그렇다면 나만 갖고 있는 경험을 살리는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인스스에서 지난해 칸 영화제에 함께 갔던 기자가 개인적으로 다시 칸에 간다는 이야기를 올렸을 때, 내 고민을 담은 마음이 덜컹덜컹거렸던 것 같아.


지난해 난 운이 좋게도 칸 영화제를 취재했어. 굉장히 힘든 일정이었지만 한국 영화사에 길이 기억에 남을 장면을 지켜봤지.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과 <브로커> 송강호 배우를 만났고 칸에서 수상하는 장면을 라이브로 봤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는 일본어로 인터뷰를 하는 경험도 했어. 아이유와 찍은 사진과 사인이 오랫동안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고. 그런 경험을 다시 살릴 수 있다면, 그게 자기만족이더라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 거야. 내가 알기로는 연이어 2번이나 칸 영화제를 커버한 방송 기자는 없거든.


다녀온 뒤 1년 동안 칸에서 봤던 영화가 차례차례 개봉하는 즐거움도 있었어. 앞서 말한 두 영화 외에도 <헌트>, <다음 소희>, <리턴 투 서울>이 최근까지 한국에서 개봉했어. 미리 본 영화를 아는 척할 수 있다는 게 내 지적 허영심을 마구 자극하더라고.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영화는 <슬픔의 삼각형>. 밀려드는 한국 영화 일정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까 다른 영화를 하나 봐야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렇게 고른 영화가 바로 <슬픔의 삼각형>이었는데, 영어 대사와 불어 자막 사이에서도 너무 즐겁게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나. 유일하게 골라 본 영화가 황금종려상까지 수상했으니 그 경험은 잊을 수가 없더라.


만약 칸에 간다면! 울렁이는 마음과는 별개로 계산기를 두들겼어. 500만 원은 깨지겠지? 비행기 값과 영화제 기간 치솟는 숙소 값. 갑작스러운 휴가 일정이니까 회사에서 허락할 지도 의문이었어. 얻을 건 추상적인데 사라지는 건 구체적인 숫자. 고민을 하게 되더라. 회사 선배들과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오히려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어. 생각을 뒤집어 보니까 돈만 있으면 내 두근대는 마음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 거야.


연차와 주말 근무로 생기는 대체 휴무를 붙여서…, 결국 가기로 했어.



영화제에 500을 태워?

<헤어질 결심> 티켓을 구하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칸 영화제는 폐쇄적인 영화제로 유명해. 일반 관객들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창구가 제한적이거든. 관계자나 언론을 제외하면 영화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회의 창구를 조금 열 뿐이라고 들었어. 뤼미에르 극장 앞 크루아제트 거리에 티켓을 달라는 푯말이 매번 화제가 되는 건 그런 이유야.


KakaoTalk_20230515_215442471.jpg 칸 영화제는 색깔로도 사람을 차별해. 파란색 위에 핑크색. 방문 횟수나 매체의 규모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높은 등급은 기자회견에 먼저 들어갈 수 있어.

프레스 등록도 까다로워. 두 종류의 프레스 배지를 발급하는데 하나는 에디토리얼, 또 하나는 오디오-비주얼 프레스야. 쉽게 지면/온라인 매체와 방송 매체를 구분한다고 보면 돼. 웃기는 건 방송 매체의 경우 어떤 작품이 나올지 결정되기 훨씬 전인 3월에 매체 등록이 끝나버린다는 거지. 지난해에 등록했거나 말거나. 환경 부담금 명목으로 배지를 발급하는 데 비용도 필요해. 5유로 정도로 비싸지는 않지만.


지난해 우리 회사는 꽤 늦게 칸 취재가 결정됐어. 회사로서는 첫 칸 출장이어서 아무 경험치가 없는데, 등록 기간은 지났지, 배지가 나올지 어떨지 알 수가 없으니 불안감이 엄청났어. 등록 기간을 놓쳤다면 등록하고자 하는 프레스 메일을 붙잡고 씨름하는 수밖에 없어.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면 오산…, 프랑스 여러분은 일처리가 한국과 같지 않아. 성질 급한 한국인은 안 되는 영어라도 하려고 전화기를 붙잡고 00700을 수십 차례 눌렀지. 돌아오는 대답이 ‘서류 다 냈으면 위원회가 알아서 할 거야’ 일 때 내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76회 칸 영화제는 어떨까?


KakaoTalk_20230515_215942110.jpg Cannes 2022, 올해는 앱 없더라

지난해 칸 영화제와는 뭐가 달라졌을까? 먼저 눈에 띄는 건 애플리케이션이 없어진 거야. 작년에는 칸 영화제 앱이 있었고 거기에 접속해 영화를 예매할 수 있었거든. 사라진 이유는 불안정한 서버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접속해서인지 며칠 동안 영화 예매가 아예 불가능할 정도였는데 키오스크에 줄이 엄청나게 늘어섰었어.


아쉬운 점도 있지. 작년과 달리 이번 칸 영화제에는 경쟁 부문에 진출하는 한국 영화가 없어. 국내 여론은 수상에 큰 가치를 부여해. 어떤 방송국도 올해 영화제를 커버하지 않는 데서 알 수 있지. 취재 기자 한 명만 보내서 비용을 절감하는 신문도 지난해보다 출장이 훨씬 줄었더라고. 하지만 영화제 자체만 본다면 어느 때보다 중량감이 있는 영화제기도 해.

2023 칸 영화제 기대작 20선. <출처=https://thefilmstage.com/>

무엇보다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감독만 5명이나 경쟁 부문에 진출했어. <브로커>로 칸에 왔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연속해서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렸지. <어느 가족>의 안도 사쿠라와 함께 한 <괴물>은 상당히 기대작이야. 직접 각본을 써 왔던 고레에다 감독이 다른 각본가와 만난 작품이라 더 흥미로워. 내게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작품으로 기억에 남는 감독, 켄 로치도 있어. 익숙하지는 않지만 난니 모레티(이탈리아), 누리 빌게 제일란(터키), 빔 벤더스(독일) 감독도 신작을 냈어.


주목받는 영화는 또 있어. 독특한 미감으로 국내에도 수많은 팬을 거느린 웨스 앤더슨 감독의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개봉하고, <인디아나 존스>가 새로운 시리즈를 발표하고, 픽사의 새 영화 <엘리멘탈>은 영화제의 폐막작을 맡았어. <캐럴> 토드 헤인즈의 새 작품이나,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로 우리에게 알려진 미아 와시코브스카 주연의 <제로 클럽>도 있고. 케이트 블란쳇의 새 호주 영화도 있더라고. 올해에는 일본 영화가 많이 소개된다는 느낌도 있었어. 기타노 다케시가 <쿠비>라는 새 역사 장르 영화를 발표하고, 칸 클래식에서는 오지 야스지로의 영화가 상영을 준비 중이더라.


한국 영화도 빼놓으면 아쉽지. 가장 주목받는 건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 배우의 <거미집>이야.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는데 어느 영화 관계자 말로는 “칸이 좋아할 만한 시나리오”라고 하더라고. 팍 와닿지는 않았지만 보고 나면 꼭 설명을 남길게. 이선균 배우는 두 영화가 함께 초대되는데 하나는 정유미 배우와 함께 한 <잠>이고, 또 하나는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불려진 <탈출:프로젝트 사일런스>야. 미드나잇 스크리닝은 <부산행>과 <헌트>가 이름을 올린 섹션인데 그래서 기대감이 높네. 두 배우의 영화가 불려진 데는 <기생충>의 파워도 있다고 생각해.


이번 영화제에선 신인 감독들이 더 주목을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송중기가 주연한 <화란>의 김창훈 감독, <잠>의 유재선 감독 모두 신인이야. 칸에서는 영화제에 작품을 낸 신인 감독들이 모두 황금 카메라상 후보가 돼. 작년에도 <헌트>로 데뷔한 이정재 감독의 수상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었어. 수상에 대한 기대감이 거의 없는 지금 만약 황금 카메라상을 수상한다면 감독들의 인지도도 훨씬 올라가지 않을까 싶어.


또 하나 신인이 있다면 바로 제니. HBO의 드라마 <더 아이돌>이 칸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이거든. 기자회견에 제니가 나올까? 드라마 속 비중은 얼마나 될까? 연기 도전은 어떤 평가를 받을까? 현지에서 지난해 아이유가 주목을 받은 것 이상으로, 제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마지막으로 거장 홍상수 감독의 <우리의 하루>는 감독 주간 폐막작으로 선정됐어.


16시간 하늘을 날고 땅을 달려 닿을 칸. 6박 8일간의 여정이 휘발되지 않게 잘 담아보려고 해.

벌써부터 아쉬운 점이 생기긴 했어. 내가 가장 기대했던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그리고 픽사의 <엘리멘탈>이었거든. 용하게도 내 일정을 앞뒤로 모두 피하더라 ^^ 한국 기자 단독으로 고레에다 감독을 칸에서 인터뷰하려고 했던 기회도 바이바이. 한국 영화를 다 커버할 수 있으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하지만 또 다른 영화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란 마음을 먹기로 했어. 궁금한 점이 있다면 영화제 기간 동안 대신 묻고 또 돌아다니려고 해! 왜 일을 나서서 하나 싶기도 하지만, 기회라는 건 내가 만들지 않으면 누가 만들어 주지 않더라고. 내가 가진 것을 잘 활용해 보자는 이 마음이 욕심일지 어떨지. 알차게 잘 보내길 기도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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