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 상처가 주는 상처
버스 정류장에 앉아 고개를 떨군 채 나의 시선은 그의 다리에 머물렀다. 그때 흔들리던 그의 다리를 잊을 수 없다.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옅어져 아문다. 내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되려 선명해져 더 큰 상처로 내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흔들리는 다리를 본 것이 그 날 뿐은 아니었다. 일 년 전 즘 또 나의 고개는 바닥을 향해 있었고, 낮은 테이블 사이로 엄마의 다리가 보였다. 나의 시선이 엄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다리를 보고 있었던 그날과 마찬가지로, 내가 뱉어버린 말들이 이미 나에게 돌아와 상처가 되어버렸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다리도 흔들리고 있었다.
“아빠는 잘 지낸대? 별다른 일은 없고?”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던 순간이 온 것이었다. 엄마는 본인이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어필이라도 하려는지 툭 질문을 던졌다. 오히려 그런 애씀이 내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에 나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해야 해, 자연스럽게 툭 이야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긴장이 두배가 되었다. 나는 침을 삼켰고 그 소리는 오히려 적막을 더 무겁게 했다.
“미국에 가서 살고 싶대.”라는 말을 겨우 입 밖으로 꺼냈다.
“아빠가 이혼하고 싶대?”라고 또 툭 질문을 해왔고, 나는 또다시 힘겹게 적막을 깨며 “응.”이라고 대답해야 했다. 2분도 채 되지 않을 시간 동안 나의 시선은 엄마의 흔들리는 다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겠지만 아무래도 상처는 숨길 수가 없는 것인가 보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의 다리가 떠올랐다. 꽤 늦은 시간이었고, 가로등 한 개의 희미한 빛이 겨우 서로의 존재를 밝혀주고 있었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던 학교 정문 벤치, 그곳에 나란히 앉아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야 했다. 그의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던 마음에 턱없이 부족했던 나의 그릇은 자꾸만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다. 어렸던 나의 마음은 자상하기만 했던 그의 마음을 되려 탓하고 싶었다. 그렇게 가시 돋친 끝내자는 말이 차가운 공기를 만났을 때, 그의 다리는 흔들렸다. 그것이 상처가 숨겨지지 않음의 몸짓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일주일 내내 그 흔들리던 다리가 생각났고, 반년이 지나서도 문득 떠오르곤 했다. 지금은 꽤나 과거의 일이지만, 그 희미한 조명 아래 흔들리는 다리는 점점 더 선명해져 나의 마음을 콕콕 아프게 한다.
결국 아빠는 미국에 갔다. 그리고 종종 내게 엄마의 안부를 물었고, 엄마도 종종 나에게 아빠의 안부를 물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하다. 나에게 안부를 물을 때면 둘 다 꼭 잊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엄마한테 잘해. 잘해 줘, 너라도.”
“아빠가 하고 싶은 일 열심히 응원해 줘라.”
마치 그들은 이미 서로가 받은 상처는 잊은 것 같았다. 그저 본인이 준 상처만이 남아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받은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다. 준 상처는, 그 가시 돋친 말들은 다시 돌아와 자기 자신을 찌르게 되어있다.
오늘 아침에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요즘 엄마의 최대 관심사는 내 직장이다. 월급이며 직책이며 세금이며, 누구는 어디 회사로 이직을 했다더라 등의 이야기.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이야기와 같은 류의 질문을 하는 엄마에게 나도 모르게 짜증을 내 버렸다.
“그런 거 관심 없다고.”
약간의 침묵. 엄마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그래, 알겠어. 잘 쉬어.”라며 전화를 끊는다. 그제야 아차, 준 상처의 화살이 벌써부터 다시 나를 겨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짜증내서 미안하다는 카톡을 남겼다.
카톡을 보내면서 문득 상대방을 위해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지독하게 이기적인 이유로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진정성 있는 친절함의 베풂이다.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사회적 기준에 마땅히 부합하기 위해서라는 도덕적 허상이 이유라면 그것에는 타당성도 지속가능성도 진정성도 없다. 자기 자신에게 돌아올 커다라한 상처에서부터 스스로를 자유케 하기 위해, 남에게 감히 상처를 주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아담 스미스가 논했던 도덕감정이다. 이간은 이기적이지만, 또 그렇기에 무한하게 이기심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도덕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타자와 내가 결국 하나라는 것은 깨달음의 가장 높은 경지로써 지극히 이기적이고 또 가장 이기적인 형태로써 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받은 상처보다 준 상처를 내내 짊어지며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