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에 대한 고찰

내가 준 선물을 재활용해 내게 선물한 사람

by 재인

우리는 오다이바 해변에 누워 도쿄 베이를 붉게 물들인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놀이로 살짝 젖은 발등을 기분 좋게 말려주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코나 맥주를 넘겼다. 특별한 것을 한 것도 아닌데, 마침 누군가가 틀은 원리퍼블릭의 노래가, 희미해지는 노을이 아쉬울 틈도 없이 무지개 빛을 뽐내는 레인보우 브릿지가, 앞에 도란도란 어깨를 나누고 있는 연인의 뒷모습이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는 주말 저녁이었다.

“살면서 언제 본인이 가장 로맨틱했다 생각해?”

로맨틱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저녁이었다. 그래서 문득 내가 질문을 던졌다.


D와 눈이 잠시 마주쳤다. 이상하게 긴장감이 스쳤다. 지난주 D와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한국에도 사계절이 있냐 질문을 해 나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D는 일본 사람이다) 이번엔 또 어떤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할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D는 자기 세계 밖의 것에는 일절 관심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한국 남자 로맨틱하지 않아?”


그렇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로맨틱이란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한국 남자였지. 어딘가 대화를 이어나갈 맥을 잃어버렸다. 애써 고개를 돌리며 “J는 언제 본인이 로맨틱하다고 생각했어?” J에게 질문을 건넸다. J는 아내를 만나 이미 2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다. 대답을 기대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워낙 로맨틱하질 않아서, 그저 운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 그런 겸소한 감사함을 느끼는 것에는 분명 로맨틱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E에게 시선이 향하자, E는 바로 사전을 꺼내며 낭만적이라는 것의 의미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E는 엔지니어다)


'Romantic, characterized by expression of love' 읽으면서도 지나치게 간단해서 인지 (또 그렇다고 이보다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E는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사랑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어떤 행동에서 그 사람에 대해 진득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지는 그런 순간을 말하는 것 같아. 심히 진부 해저 버린 말이고, 온갖 미디어 콘텐츠로 인해 채색되어버린 단어이기에 얼추 근접한 예시를 떠올릴 수는 있겠지만 그 본질을 꿰뚫는 특성이 무엇이다라고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근데 반사적으로, 그것도 자신감 넘치게 그 본성을 이야기했다는 것이 놀라워 이 확신의 근원지에 대해 고찰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바야흐로 대학교 3학년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의 일일 것 같다. 뉴욕에 거주 중인 서강대학교 모임에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필자는 서강대학교 졸업생이다) 그 식사 자리에서 아마존에 재직 중이었던 선배 A를 알게 되었다. 나는 컴퓨터 공학을 공부 중이었고 개발자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아마조니언을 만났다는 것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 부신 후광이 그 선배의 아우라에서 뿜겨 나오고 그의 모든 말은 진주알 마냥 내 귀로 또르르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의 이런 과한 경외감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언제든 좋으니 오피스에 놀러 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바로 선배를 뵈러 뉴욕 33번가 아마존 오피스에 가게 되었다. 선배는 우리는 반갑게 마지해 주셨고 구석구석 열심히 구경시켜 주셨다. 그러다 우연히 그의 팀원인 Y를 마주치게 되었다. Y는 한국인 여성 엔지니어였고 그녀를 만남과 동시에 그녀는 나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의 우상 됨과 동시에 그녀에게 나의 미래를 투영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와 잠시 커피 챗을 할 영광의 시간이 생겼다. 나는 취조라도 하듯이 쉴 틈 없이 질문을 했다. 왜,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되셨는지, 한국에서 일하는 것이랑 어떻게 좋은지, 나쁜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지. 공부는 어떻게 했는지, 취업은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Y는 원래 삼성에서 재직 중이었고 업무에 대한 만족도는 높았으나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계기가 있다 했다. 그것은 바로 담배 타임이었다. (중요한 업무 결정을 특정 남성들이 담배를 피우는 시간을 이용해 의사결정을 하고 몇몇의 다른 팀원들이 결과적으로 배척당하는 사회적 현상이라고 필자는 이해한다) 그 때문에 자신의 업무에 대한 타당한 근거나 방향성에 대한 정당성 등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져 미국에서 다시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오기 전에 부트캠프에서의 상황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가 특정 방향으로 형성되는 것이 느껴졌고, 몇몇의 조원들이 담배를 피우러 가는 전과 후의 조 분위기, 프로젝트의 주제 등이 미묘하게 달라짐을 느꼈다. 그 미묘하지만 강렬한 배타성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문제제기도 의견 표출도 하지 못한 채 너무나도 쉽게 묵살되어갔다. 그녀의 이야기와 나의 경험이 중첩되면서 이 문제는 한동한 나의 온 신경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녀를 만난 그날 밤 K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부트캠프에서 느꼈던 것이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또 앞으로 나의 커리어가 그런 식으로 계속될 것 같다고.


그 당시 나의 애인 K는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 전공도 성비가 한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기에 K의 조별과제도 늘 다수의 남학생과 한 두 명의 여학생으로 구성되곤 했다. K도 이 때문에 나름의 스트레스가 많이 있었는데 여학생들의 참여에 성실함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전화를 끊고 잠에 들었다. 반면 14시간 차가 있었던 한국에서의 K는 하루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내가 눈을 떴을 때, 카톡이 와 있었다. 나와 전화를 하면서 그저 참여가 저조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기 전에 참여를 할 수 있는 분위기 형성이 부족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 혹시나 그런 문제를 느끼고 있는지 개선의 필요성이 있으면 제안해 달라고 했다고.


물론 K는 나를 배척한 팀원들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젠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내가 여성으로 혹은 아시아인으로, 개발자로 사는 삶 속의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해 줄 수 없다. 그런 무력함에도 자신의 삶 속의 다른 한 명의 여성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것이 나를 돕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한 것일지 느껴졌기에 나는 커다라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문제가 본인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그 넘치는 마음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따사로운 로맨틱한 손짓이었다.


그리고 일 년 후, 우리 둘 다 졸업을 하게 될 즘이 되었다. 나는 어떤 계기로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쓸 예정이긴 하지만,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며 나름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사실 관계라는 것이 어느 정도 무의미한 소비주의와 물질주의로 둔갑한 "축하"나 "기념"의 점철로 겨우 이어져 있는 게 않는가. 그런 서로가 온전히 만족할 수 없는 관습화 된 선물교환 없이 순수히(?) 관계를 유지해나갈 수는 없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물질과 소비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선물이라는 문화적 사회적 관습을 계속해 나아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K에게 많이 던지곤 했다. 졸업식날이 되었고, K의 부모님이 멀리 사셔서 졸업식에 못 오게 되자, 우리 엄마가 잊지 않고 K의 꽃다발까지 준비했다.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졸업을 했다.


졸업을 하고 일주일 후, 화이트데이 기념으로 데이트를 하러 K와 연남동에서 만났다. 그는 내게 선물이라며 꽃다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 꽃다발은 내가 졸업식 때 그에게 선물한 꽃을 직접 말린 드라워플라워 다발이었다.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어떤 이유로 내게 이 선물을 했는지, 그간 내 고민들을 얼마나 진심을 다해 듣고 열심을 다해 고민을 했는지의 흔적이 그대로 느껴졌다. 단 한마디의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나의 가치관을 온 힘을 다해 존중해주려는 사람이라는 것이, 또 그것을 자신의 삶에까지도 반영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 작고 커다라한 꽃다발에서 전해졌다. 그런 마음을 받아 본 적이 있어서, 그래서 로맨틱이 뭔지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있어서 실로 감사하다. 나야말로 그저 운이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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