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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oland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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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Apr 05. 2024

3월 26일 타마치역

타마치역에서 레인보우 브리지까지는 걸어서 23분이 걸린다. 


퇴근 후 전철을 타고 역에 도착했을 때는 5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오다이바 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레인보우 브리지를 통과해야 하는데, 11월과 3월 사이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개방한다. 그 사실만 확인하고 이틀 전에 6시가 되기 좀 전에 레인보우 브리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크게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6시가 되었을 때 다리의 반대편 입구도 개방시간이 종료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마지막으로 입장이 가능한 시간은 5시 반이었던 것이다. 계획이 틀어질 때 온갖 심술이 비뚤어져버리는 나는 그 참담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결코 늦을 수 없다는 사명감으로 나는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쌤에게 뛰자는 손짓을 보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러닝을 해두길 잘했다 생각한다니까.” 뒤를 돌아 그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나는 반팔로된 캐시미어 니트와 체크무늬의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뛴 것은 아니지만 몸 구석구석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와 다르게 목뒤와 미간 쪽이 간지럽다는 감각이 들었지만 옷 때문일 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시간에 맞게 다리의 입구에 도착했다. 나와 그는 유쾌하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니 탁 트인 온 주변은 황혼 녘을 향하고 있었다. 주황인 듯 보라인 듯 오묘한 빛으로 배어들고 있는 하늘과 맞닿아있는 도쿄 베이의 시시각각 변하는 물듦을 만끽하였다. 신나는 말투로 다음에는 제대로 운동복을 입고 와서 다리 위 러닝을 해보자 그에게 말했다. 실컷 경치를 누리다 반대편 입구로 빠져나오니 어느새 해가 지고 껌껌해져 있었다. 다이바 해변가로 향해 그가 준비해 온 돗자리를 깔고 자리에 앉았다. 칠흑 같은 하늘과 바다였음에도 은은하게 반짝이는 다리와 잔잔히 떠있는 배들의 조명 덕분에 어둡다는 느낌이 들 새가 없었다. 


하늘과 경계가 없는 짙은 해변. 도란도란 앉아 있는 청춘들. 그사이에 겨우 어우러진 이방적인 둘. 정면만을 응하고 있는 둘. 


그는 내게 체리맥주를 건넸다. 그리고 어김없이 아이스박스에서 직접 만들어온 저녁 도시락을 꺼내 주었다. 매쉬 포테이토와 그레이비, 그리고 트러플 스테이크. 체리맥주는 생각보다 달지 않았다. 은은한 체리향이 입가를 맴도는 정도와 무겁지 않은 바디감이 잘 어우러졌다. 맥주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만, 맥주 애호가인 그가 선택했다는 것으로 충분한 기대감과 만족감을 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꿀꺽꿀꺽 삼켜 내렸다. 어서 먹어보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오자 나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요리를 맛보았다. 언제나와 같이 담백하면서 깔끔한 그의 솜씨였다.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을 꽉꽉 담으면 간이 지나치게 달거나 짜질 수 있다. 각 재료가 자기주장을 거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그의 요리는 그런 넘치는 마음과 정성이 느껴지지만 절대로 뽐내려 하지 않는 절제된 미가 있었다. 그의 요리에서마저 묵묵히 안 보이는 곳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애쓰는 그를 닮아 있다 느꼈다. 


익숙하지 않지만 조화로운 트러플 풍미와 부드러운 육즙을 음미하던 도중 나는 갑작스럽게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뿐일까, 귀밑이 부어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까 뛰어올 때부터 애써 외면했지만 따끔따끔 간지러운 감각은 눈썹 근처 인중에서 볼부근까지 옮겨갔다. 더 이상 무시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어서 확인을 해보아야겠다 느껴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환한 빛 아래 거울을 보니 온 얼굴, 목, 그리고 팔다리까지 두드러기 같은 증상이 보였다.


생에 첫 알레르기 반응이었다. 지난 스무 년 동안 내게 알레르기는 미국 영화의 한 장면, 피넛을 잘 못 먹어 목이 부어 응급실로 실려가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문득 그렇게 목숨을 잃을 뻔한 이야기들이 머리를 스치며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느껴 패닉 하기 시작했다.

“나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거 같아.”라고 쌤에게 나름 다급하게 말하며 증상을 보였다.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져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정말 어딘가 나사가 빠진 사람 마냥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일단 짐을 먼저 싸야 할 것 같아.”라고 내가 마지못해 말을 하자 그가 도시락을 챙겨 가방에 넣고 돗자리를 접기 시작했다.

나는 문득 알레르기로 병원에 다녀왔다는 회사 동료의 말이 생각나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녀에게 증상 사진을 몇 장 보냈고 병원에 가야 할지, 간다면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 물었다. 그녀는 곧바로 전화가 왔고, 의외로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그거 아마도 꽃가루 알레르기일 것이라고 했다. 일본 사람들 대부분이 봄이 오면 고통받는 것 중 하나라며 병원에 갈 필요는 없어 보이니 약국에 가서 약을 사 먹으라 했다. 그녀는 내가 약국에서 직원에게 물어볼 수 있도록 일본어로 된 간단한 문장과 그것의 발음까지 친히 적어 답장해 주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약국에 가서 화분증 약을 사 먹으니 삼십 분도 되지 않아 증상이 사라졌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저 우두커니 서 있던 그의 쓸모없는 존재가 조금 거슬렸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내게 도움을 주려 여러 노력을 해왔지만 정작 내가 필요한 도움은 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배부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의 집은 반대방향이지만 굳이 굳이 오늘도 데려다주겠다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갈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하나는 알고 둘은 절대 모르는 그다. 전철 안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문득 처음 그가 나를 집으로 짐을 옮겨주던 날이 생각났다. 그는 또다시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은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와 다양한 공간에서 만나왔지만 어떤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 그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사쿠라신마치역에 도착하는 동안 그는 내게 한 마디도,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까 긴급할 때 나에게 약국에 가자거나 어느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 한마디 못한 채 발만 동동거리던 동그란 눈의 쌤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원치도 않은 채 구태여 그와 동행되어 집 앞까지 원인 모를 침묵 속에 걸어야 하는 것이 개탄스러웠다. 사실 그가 어떤 이유로 자신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는지 나는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내 애정 어린 관심을 주고 싶지 않았다. 어떤 정보를 취할 뿐이라는 오명을 쉽게 써질 것을 알아서일까. 그에게 이끌리듯 생겨나는 의문들을 애써 외면하며 빠르게 집 쪽 골목으로 걷고 있는데,

“저번에 갔던 바에서 한잔하고 들어갈래?”라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내심 기다렸다는 듯한 반가움을 느꼈다. 그렇게 익숙한 바에 들어갔다. 나는 먼저 화장실에 가겠다 했다.


돌아와 보니 작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는 어딘가 차갑다 못해 소름 끼치는 냉기의 표정을 하고 의자에 앉으려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쌤이 아니었다. 


“What happened?” 그의 갑작스럽게 반전된 기분의 영문을 알 수 없던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네가 그게 왜 궁금한데,라고 눈으로 말해오는 것 같았다. 그의 침묵은 환멸, 경멸 그리고 파괴를 말했다. 그가 꽉 잡은 유리컵이 부서지진 않을까 하며 그것에 눈을 고정하는 것 말고는 내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침착을 유지하려 했으나, 나는 이 낯섦이 겁이 났다. 친숙함으로부터의 배신은 섬뜩했다. 익숙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내가 알던 쌤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침묵, 침묵처럼 잔인한 게 없다 생각했다. 한없이 무해하던 존재여서 그랬는지 한 순간 변질된 위협의 위력은 몇 배로 느껴졌다. 나는 어떤 무력감을 느꼈다. 그런 무력감으로 그를 관찰했다. 그의 눈은 날카로웠다. 뾰족했다. 언제부터 그의 쌍꺼풀이 칼에 베인 것 같이 깊었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의 무원감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흠칫하던 그였다. 그 흠칫에 그를 감싸는 공기의 온도마저 바뀌었다. 차갑디 차가운 가면이 순식간에 녹아 바보 같은 동그라한 눈을 한 쌤으로 돌아왔다. 온도가 갑작스럽게 바뀌어서 그런가, 그 동그라한 눈은 눈물을 쏟으며 내게 미안하다 말해왔다.

유기적이지 않은, 인간적이지 않은, 기계의 스위치처럼 단번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큼이나 당황스러운 것이 그의 눈물이었다.

“Oh gosh, what have I done.” 그의 두꺼운 손으로 얼굴의 반쯤을 가리며 토해냈다. 마치 전적으로 자신의 컨트롤 밖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눈물이었다. 


십분 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 앞에 앉아있었던 사람은 쌤이 아니었다. 그는 로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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