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치대학교에 다시 방문을 했다. 이 학교는 아담하지만 강가를 끼고 있어서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이면 청춘의 기운을 차오른다. 2년 전에 처음 이 학교에 발을 딛었을 때에도 차오르는 청춘을 만끽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일본의 풍경은 어딘가 아스라이 아련한 기분을 품고 있다. 생전 처음 와본 곳도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간지러움이 있다.
쌤과 나는 우리가 같이 수강했던 강의실에 들어갔다. 우리는 항상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있는 가온데 열의 자리에 앉았었다. 그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내 왼쪽자리에 머리 긴 남학생. 항상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 겨우 짧은 답을 받을 수 있었던 수줍음과 무관심의 중간쯤을 견지하던 학생.
“안녕. 점심 먹었어?”
“응.”
“여기에 이름 써 줄 수 있을까? 그럼 내가 제출할게.”
“그래.”
“이 그래프 분석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괜찮은 거 같은데.”
같은 줄, 같은 열에 자리했다는 이유로 우리는 한 학기 동안 매 수업의 과제를 함께 해야 했다. 그 수업은 통계적 분석 수업으로 매 수업 학생들에게는 방대한 량의 데이터가 주어졌고, 그것에 대한 여러 도구를 사용해 통계적 분석을 한 후 결과를 적어 제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어떤 흥미로운 수도 그것이 암시하는 어떤 사회적 현상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딴청을 피운다거나 존다거나 하는 일은 일절 없었다. 그저 침묵으로 자료와 제출용지를 응시하던 그였다. 절대 먼저 아이디어를 제시하지 않았고, 내가 제시한 의견에 대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직한 고깃덩어리 같은 존재였다, 나에겐.
학기가 끝날 즘에 기말고사를 보게 되었다. 시험을 보던 날에도 내 옆자리에 앉았던 그였다. 나보다 훨씬 일찍 시험지를 제출하고 앞문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역시 이 수업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더니 시험도 대충 보고 나가는 건가’ 생각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가 흘렀고, 열심히 빼곡히 적은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도 강의실을 나섰다.
문을 여니 그가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한참 전에 시험지를 제출했는데 왜 아직도 여기에 있나 의아했지만 다른 수업 기다리다보다 했다. 별생각 없었다.
“시험 잘 봤어? 일찍 나가던데.”라고 그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를 정면으로는 보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 그 펜을 놓고 가서.”라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해왔다.
“그렇구나. 시험은 별로 안 어렵던데, 그렇지?” 뜻밖의 대답에 나도 당황해 다시 시험 이야기로 답문 해버렸다.
“응.”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교환학생이라 시험 끝나면 다음 주에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동안 수업 같이 듣게 되어서 재밌었어.”라고 마음에 없는 인사치레를 하고 갈 길을 가려했다. 그러자 그도 황급히 내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얼굴을 한 채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동그란 눈은 내게 도움을 청하는 듯해 보였다. 적당히 눈치를 챈 나는,
“혹시 SNS 하면 아이디라도 공유할까?”라고 말했고,
“그러자.”라고 정말 기다리던 말이라는 듯이 그는 잽싸게 말했다. 그렇게 어색하게 아이디를 공유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갈 길을 갔다. 수업 내내 나에게 그는 이름이 붙이어진 고깃덩어리 정도의 존재였고 그것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한국에 돌아가 있는 1년 반의 시간 동안 나는 그의 이름조차 까마득하게 잊어갔다. 하지만 그는 SNS를 통해 나를 알아갔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 어떤 특별한 인연을 맺어왔다고 생각해 왔던 것일까? 화면을 통해 보이는 허울이 나의 전부라 믿으며?
낮에 조치대학교를 들른 이유는 저녁에 조치대학교 출신의 쌤의 친구들을 역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루카스와 쇼, 마이클, 그리고 알렉스.
나는 결코 이 자리가 불편했지만, 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거만한 배려심으로 나갔다. 쌤 또한 이 자리가 퍽 피곤한 자리지만, 나를 위한 희생으로 성사시켰다. 그는 내게 호의를 통해, 주로 본인 딴에의 큰 희생을 동반한, 호감을 표현했다. 나는 호의를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 절대로 기울어진 사이가 되지 않기 위한 안간힘으로 또 다른 호의로 표했다. 호의는 호의일 뿐이다. 그가 나의 호의를 호감으로 줄곳 오해할까 두려우면서도 호감 없이 호의를 받기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호감이 있을 때에만 호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둔한 인간은 호의와 호감을 칼 베듯 구분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허나 호감을 호감으로 표하지 않고,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대감과 실망감, 의무와 희생 따위로 인생이 퍽 고단해진다.
마이클은 석사과정을 마친 뒤 나와 같은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우리는 회사 안팎에서 둘이 종종 만날 때가 있었다. 쌤은 이것에 대해서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내가 마이클을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나는 한 학기 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조치대학교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회사 동기를 만난다는 것은 여간 기대되는 만남이 아닐 수 없다. 그뿐일까, 마이클은 인도네시아에서 자라 대학 진학을 위해 도쿄로 왔다. 인도네시아. 그의 배경이 나를 몹시 흥분시키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 일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내 삶의 전환점이었다고 거추장스럽지만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나의 온 흥미와 주의는 마이클에게 쏠렸다.
“인도네시아 출신이라며.”
“Yeah, I hate that country.” 그의 거칠고 단호한 대답에 들떠있던 나의 마음이 두 동강 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렇게까지 낙심할 반응은 아니었다. 누군가 초면에, 아니 초면이 아닐지라도, 한국에 대해서 떠들어 대는 것은 나도 환영하는 바는 아니다. 누구보다 한국 문화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나는 놀란만큼 더더욱이 아무러 영향을 받지 않은 척 그 나라에 대한 열성을 보였다.
“I spent about three weeks in Yogyakarta few years ago. I even own one of those batik.”
“Oh yeah? I don’t even have one.” 일관적인 무심한 반응을 보였다.
“What about that place you don’t like? It was such a pleasant memory for me.”
그렇긴 하다. 고작 3주 관광을 한 것으로 그곳에 정착해 착실히 살아내 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관광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한 이유는,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계기가 해외봉사활동의 일원으로 가게 된 것이었지만, 봉사란 결국 어떤 식민주의적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관광에 지나지 않음을 머지않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Maybe it's just my family, I just don’t get along with them. I want to be as far as possible from them.” 나는 더 이상 묻는 것을 포기했다.
“팔에 있는 타투, 어떤 의미가 있어?”
세간의 모든 걱정과 짐을 끌어안은 얼굴로 알렉스와 쇼에게 자신의 대학원 연구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루카스가 돌연 내게 질문했다. 음식점에 자리를 잡은 이래로 그는 자신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인공지능을 이용한 음악 생성이라는 과제에 큰 흥미를 못 느끼겠는데 스타트업에서 오퍼를 받아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자랑을 둔갑한 시세 한탄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주의를 모으기 충분했고, 덕분에 나는 알렉스와 쇼와 인사도 겨우 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질문을 하이볼과 함께 한 차례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신년 파티 때 내게 이미 해온 똑같은 질문이라는 무례함을 전혀 모른다는 그의 해맑은 얼굴. 나 또한 그때와 똑같은 웃는 얼굴로 답해줬다. 물론 다음에 만날 때 다시 같은 질문을 받을 각오와 함께.
쇼는 한국인 어머니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군역문제 때문에 일본 시민권을 택했다고, 당연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 마냥 이야기해 왔다. 본인이 아무리 시민권은 일본이라 해도 자신은 한국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다 했다. 그것은 바람둥이라고 자신이 낙인찍은 아버지에 대한 혐오, 한국에 남아있는 어머니에 대한 아련함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어머니가 강남에 혼자 살고 계신다 했다.
“현 대통령을 별로 안 좋아하시겠네, 어머니께서.” 당시 한창 보수와 진보 진영이 부동산의 문제로 대립할 즘이라 가볍게 농담을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라고 바로 받아치는 그에 대해서 나는 키아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낙인찍으며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아 갔다.
나는 그 누구와 친해질 수 없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대화를 이어갔다. 사교성과 붙임성을 팔아가며 애썼다. 나에 대한 평가가 쌤에 대한 평가로 이어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까.
다들 술에 거하게 취했고, 음식점에서 나왔을 때는 서로를 껴안으며 애틋한 우정을 보였다. 물론 그 포옹의 중심에는 루카스가 있었고 그를 둘러싼 어색한 영혼들이 있다 느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인사를 하고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쌤은 다를 데려다주겠다며 뒤를 쫓아왔다. 전철에 타자마자 쌤은 마이클에 대해,
“I'm sorry about Micheal. He is too blunt.”라고 내게 불필요한 사과를 대신하곤 했다. 본인이 그를 싫어하는 것을 마치 나에게 무례했다는 것으로 포장하려는 듯이. 오히려 나는 그냥 솔직하고 단순한 마이클의 대화방법이 유쾌하다면 유쾌하다고 느꼈다. 자신이 나의 보호자라도 되는 마냥 누구를 대신해서 사과하는 그 오만함이 오히려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어떤 근거로 내가 기분이 나빴을 거라 추측 확신하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그의 태도로 본인이 기분이 나빴더라면, 그저 솔직하고 단순하게 본인이 기분이 나빴다고 했으면 말았을 일이다. 요구하지도 않은 나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지, 이것이 나를 미치게 만들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