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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Roland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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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Apr 12. 2024

4월 17일 한조몬역

최초의 긍정적 학습은 대학교 3학년 여름 인도네시아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이다.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17일 동안의 족자카르타의 생활로 인해 나의 알은 산산조각이 났다. 

스며들기. 이것이 봉사활동의 주제였다. 나는 예수회 재단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신부님들이 계셨다. 그리고 이번 봉사활동도 예수회에서 주최한 것이기에 신부님과 함께 봉사활동에 가게 되었다. 봉사활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수 차례의 연수가 있었다. 이번에 참여하게 된 열몇 명의 학생들은 사실 봉사에 큰 뜻이 없어 보였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들 외국에 가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심과 해외 봉사활동은 좋은 스펙이 된다는 꽤나 당연스럽고 천박한 이유로 지원했다고 본다. 그걸 익히 알고 계셨던 신부님은 첫 연수 때 최근 남발하는 봉사활동의 식민주의적 우월주의에 대해 재고해 보자고 하셨다. 고등학교 때도 비슷한 해외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캄보디아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만들어서 직접 방문해 전해 '주는' 봉사였다. 그때도 본격적으로 동화책을 만들기 전에 몇 차례의 연수가 있었고 캄보디아의 참상을 공부하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그런 타인의 고통에 노출은 필연적으로 우월주의를 둔갑함 미묘한 감사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의 한계와 그 시선으로 인해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버리는 그들의 지옥, 혹은 그들과 우리의 분리 등에 대한 의식이 완전히 결여된 채 어린 마음의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우리가 캄보디아에 살고 있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를 느끼며 모두가 한 마음으로 동화책을 제작했다. 그런 강렬한 동정의 감정이 동력이었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뭐든 '주려'했다. 도와 '주고' 싶었고 나눠 '주고' 싶었다. 이 봉사활동 이외에도 불우이웃에게 영어책 읽어 '주기' 및 영어 가르쳐 '주기' 등의 봉사활동을 계속했다. 그렇기에 봉사활동의 본질은 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스며듦의 의미에 대해서 나눔을 해보자."라고 신부님이 말씀을 이어가셨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와 '주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 감히 우리의 자취들이 그들의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주의를 하자는 것이었다, 아주 사소한 행동일지라도. 이를테면 한국에 있는 과자를 인도네이사 아이에게 건네주는 행위, 이것이 우리가 떠난 후 남겨진 아이들에게 영원히 즐기지 못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사소하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영향력에 대해서 더 의식을 갖자는 것이었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줌으로써의 봉사의 본질이 얼마나 문제적일 수 있는지, 적잔은 충격과 함께 스며듦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족자카르타에 위치한 브라윳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첫날 이사님이 우리를 반겨주시며 마을을 소개해주셨다. 

"우리 마을은 자급자족을 지향합니다. 모든 것을 마을 안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려 하죠. 우리들 손으로 일궈낸 마을입니다." 그에 걸맞게 도착과 동시에 우리는 생선을 잡으러 갔다. 자전거를 타고 코코넛 열매를 따러가고, 잡초를 뽑았다. 낮에는 바나나 잎에 쌀을 넣고 예쁘게 묶어서 쪘다. 휴식시간이 되면 아침에 직접 딴 코코넛 열매를 열어 마시며 전통 춤을 추고 놀았다. 직접 천으로 옷을 만들기도 하고 나무로 장난감을 만들어 다 같이 게임을 하기도 했다. 저녁이 되면 아침에 잡은 생선을 굽고 점심에 찐  밥을 먹는다. 자급자족이라는 개념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일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루하루를 스며들며 살아내니 자급자족이 어떤 모습이겠구나를 알 수 있었다.

음식점이나 마트에 의존하지 않고도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노래방이나 피시방에 의존하지 않아도 놀이거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쇼핑몰에 가지 않아도 옷이나 필요한 기구들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무엇인가에 의존하지 않아도 살아낼 수 있다는 벅차오르는 강인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마을에 도착한 첫날 저녁에 샤워를 하기 위해 숙소 화장실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친구가 샤워를 마치며 나오면서,

“비누하나밖에 없고 심지어 변기에 물 내리는 레버가 없어…”

여태껏 당연하게 여겼던 샴푸, 컨디셔너, 바디솝, 폼 클렌져, 메이크업 리무버가 없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 당황스러움은 여태까지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에 의존하며 살았는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사실 저 모든 것들을 마케팅에 의해 이름이 다르게 붙여진 화학물질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내게 실제로 저 모든 것들이 모든 작은 몸 부위 별로 필요했을까. 나는 한낱 마케팅의 노예였구나. 불필요한 의존성을 내려놓음은 삶에 새로운 자유를 초대하는 손짓이다.

오롯이 나로 충분히 살아 낼 수 있음을 증명하는 하루하루의 자급자족적인 삶에 스며들며 지속가능성이라는 새로운 삶의 모습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단어가 거창하게 들릴 수 있으나, 실로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로부터 촉발된 생각이다. 인도네시아에 오기 직전 봄, 나는 지극히 평범한 욕구를 가진, 지극히 평범한 방법으로 욕구를 해소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빠르게 효과가 좋은 방법으로 몸매를 만들고 싶었고, 친구의 권유로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전문 강사와 전문 기구로 운동을 하니 당연히 결과가 즉각적이었다. 그리고 결과가 보장된 만큼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그렇게 돈을 지불하면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던 몸매 및 건강이었기에 이에 대한 의존도도 다달이 높아졌다. 의존성은 접근성이 보장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하루아침에 족자카르타의 작고 작은 브라윳 마을에 떨어진 나는 당연히 필라테스 기구가 구비된 학원에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필라테스가 나의 유일한 운동 수단이었기에 접근성을 잃는다는 것은 운동 자체가 전면 중단됨을 의미했다. 의존성이 이렇게나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외부환경은 언제나 바뀔 수밖에 없지만, 어떤 특정 환경이나 조건에 의존한다면 나의 건강 혹은 나의 행복 나의 삶 전체가 중단되고 방해받고 뿌리째 흔들려버리게 된다. 자급자족이나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이 곧 반소비주의나 반자본주의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브라윳에서의 생활에 스며듦에 따라 나는 더 이상 내가 쉽게 돈만 지불하면 바로 얻을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돈을 버는 행위가 쉽지 않고 노력이 필요하단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두 손으로 채소를 심어서 채소를 먹게 되는 것과 내가 회사에서 보낸 시간에 따른 돈을 통해 채소를 사 먹게 되는 것에 다른 가치판단을 하게 되었다. 샴푸가 없어도, 예쁜 옷이 없어도, 필라테스 수업이 없어도 최소한의 것들과 두발만 있으면 건강하고 물질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게 되었다. 최소한의 의존성만을 가진 나 스스로로 지속가능한 자급자족적 독립체로 살아가고 싶었다. 어떤 외부 환경에도 흔들림 없는 일상을 구축하고 싶었다.

스며듦 속에서 우리는 나름 성공적으로 한국어 교육 봉사를 진행했다. 물론 식민주의적 우월주의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한국사람이세요? 사진 찍어주실 수 있어요?” 

식의 생각해보지도 못한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 특히 한국 드라마의 영향인지, 한국 남자라는 이유로 봉사활동을 같이 간 남자 동기들 뒤로 줄까지 서서 사진을 찍으려 했다. 한국인으로 살기가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어딜 가나 많은 관심과 환영을 받게 되어 속으로 기쁜 마음을 만끽하며 겉으로는 스며듦과 우월주의에 유의했다. 어렸을 때 미국에 살 때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사람이 몇 없었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북에서 왔어? 남에서 왔어?” 라든가 하는 터무니없는 질문들을 늘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지고 싶어 하고 사진을 찍어 달라 하는 이 10년 사이의 극적인 변화가 좋으면서도 꺼려지기도 했다. 그 반대편에 서서 서양권 사람들에게 무한한 관심과 친절을 베풀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는 어린 마음을 못 이기며 사진을 찍어 ‘주려’하고 한국에 대해 알려 ‘주려’하고 했다, 약간의 우월주의의 즐거움을 참지 못하면서. 

봉사활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물질, 재화, 서비스, 손쉬운 소비로부터 독립을 하고자 발버둥을 쳤다. 그것의 단편적인 결과로 나는 러닝과 등산을 시작하게 되었고, 한 종목에 한 가지 이상의 아이템이 있다면 모두 중고거래를 통해 팔거나 나눔 했다. 미용실을 최소한으로 갈 수 있는 헤어스타일을 채택하고, 네일이랄까 화장품과 같이 정기적인 서비스의 이용을 필요로 하는 것을 전부 삶에서 잘라냈다. 아무것도에 의존하지 않은 채 오롯이 내 두 발로 내 삶을 이어나가리란 의지의 선택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굉장히 긍정적 피드백을 받았고, 그것은 내게 강화학습되어 습관 그리고 강박으로 이어졌다. 모두에겐 선택의 자유가 있고, 재화와 서비스가 존재하는 한 그것을 소비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트레이너에게 의존해서 몸을 가꾸거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소비한다거나, 누군가에게 의탁해 자신의 시간을 채우거나 하는 모든 의존적인 행위를 나약한 것이라 치부하게 되었다. 


고궁을 달리기로 했다. 고궁은 조치대학교에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내가 그 학교에 머물던 시절 학생 휴게공간에 가방을 두고 러닝을 하러 자주 갔던 곳이다. 고궁을 중심으로 강이 한 바퀴를 두르고 있는데, 낮에는 푸른 하늘이, 밤에는 전등의 불빛이 고궁을 감싸며 반사되는 것이 기분이 눈부시게 좋았다. 가슴 벅차오르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강가를 끼고 한 바퀴를 돌면 정확하게 5킬로가 되서인지 러닝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일본이 고령화가 심각하지만 일본의 노인들은 어찌나 잘 뛰어다니시는지, 이 정도 활기라면 참된 의미의 고령화 국가는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다. 조치 대학교 쪽에서 뛰기를 시작하면 처음에 숨이 막히는 긴자의 고층빌딩과 예스러운 심플한 고궁의 입구의 조화를 만끽하며 내리막길을 뛰게 된다. 호흡을 천천히 하며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너무 빠르지 않은 페이스로 달리기 시작한다. 마음속에서 환호성을 지른다.

그렇게 상쾌한 내리막을 지나고 나면 드넓은 대로를 중간에 두고 정갈한 나무들이 빼곡한 공원이 반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길과 나의 싸움. 그림자를 드리워 줄 것 하나 없이 내리쬐는 햇빛과 나를 끌어내리는 중력, 그로부터 자유케 안간힘 쓰는 나의 뜀, 나의 심장박동과 땀방울들. 미술관이 보일 때 즘이면 이제 마지막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다리와 함께 시작되는 짧은 오르막길. 아까 내리막길에서 조금 더 힘을 비축해 둘 걸, 이를 악물고 달린다. 오르막길이 끝날 즘이면 다시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한 처음의 웅장한 내리막 풍경이 저 멀리서 고개를 들어 올린다. 독한 눈을 한채 허벅지 근육에 모든 힘을 집중시킨다. 그렇게 골인한다. 흠뻑 젖은 티셔츠를 느끼며 세상 어떤 일도 해내지 못할 것은 없다, 다시 한번 되새김질하며 숨을 고른다. 경이로운 러너스 하이를 느끼며 조금 저편에서 따라오고 있을 쌤을 기다린다. 헐떡거리며 내 앞에 천천히 멈춰 서는 그를 보며 하이파이브를 권한다.

"열쇠로 손을 얼마나 찌르며 달렸는지 몰라. 숨이 차오르는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실제로 날카로운 열쇠 자국이 나 있는 그의 손을 쳐다봤다.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 정도 달리기도 힘들어하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런 독기가 반가웠다. 여태껏 그가 보여준 편의, 좋은 것, 안락한고 즐거운 것에 대한 의존성을 고려했을 때 그에게 삶에로서의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하루에 다섯 잔씩 마시는 커피, 쉴 틈 없이 피우는 니코틴 패치, 저녁 시간을 함께하는 알코올, 자신과 타인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주저 없는 소비, 잦은 소비성 여행, 생존과 직결되지 않은 취미 같은 연구생활, 아버지 사업이라는 큰 노력이나 위험 없이 보장된 미래. 그에겐 수고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싶었는데.

나는 수고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주 두세 번은 같은 러닝을 하자고 했다. 자청한 듯 자청하지 않은 듯 그를 위하는 듯 나만을 위하면서 나는 그의 퍼스널 트레이너가 되어있었다. 


한조몬역에서 러닝이 끝나고 우리는 물을 마시며 요츠야역 쪽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에 들러서 씻고 연구실에 들려야 한다며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에게 우물쭈물거리며 끝내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백팔십 엔을 빌릴 수 있냐는 말이었다. 그 말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도 그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달릴 때의 가벼움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나는 정말 최소한의 짐을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휴대폰, 블루투스 이어폰. 이어폰의 충전 본체마저 가져오지 않았다. 당연히 현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휴대폰 교통카드 잔액이 집에 돌아가는 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망각한 채. 요츠야역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 번의 환승이 필요한데, 일본은 환승이 무료가 아니기 때문에 두 번의 전철 중 한 번만 탑승하기에 충분한 잔액이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유유자적 돌아가는 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요츠야역에서 시부야역까지 약 한 시간이 소요되는 산책을 시작했다. 4월의 뜨거운 햇볕이 목뒤에 내려 쪄지는 썩 유쾌하지 않은 감각과 함께. 


그와의 관계에서 떳떳하지 못했기에 백팔십 엔, 약 천팔백 원을 빌리지 못했던 걸까. 사실은 그에게서 받는 것에 이미 익숙해진 치우친 관계를 내가 은밀히 즐기고 있었기에. 


점심에 뭐 하냐고 물어오는 그의 연락에 대해,  

"사실 교통카드 잔액이 부족해서 아직도 집에 가는 중이야."라고 말했을 때 나의 예상과 다르게 바보 같다며 웃어주지 않고 그는 심각하게 상처를 받았다 했다. 자신이 그것밖에 안 되는 존재냐고 물으며. 

쌤이 나의 이런 저속한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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