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카와 강가를 발치에 둔 채 잔디밭에 나란히 누워 책을 펼쳤다. 둘 다 ‘마담보바리’를 끝까지 읽었지만 이상하게 서로에게 소감 따위는 묻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죄책감도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을까? 본인이 샤를인 것을?
그와 나 사이의 공공연한 코끼리를 애써 외면한 채 우리는 헤르만 헤세의 ‘골드문트와 나르치스’를 읽어 내렸다. 아직 확실하게 봄이 찾아오지 않은 것인지 써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는 내게 본인의 재킷을 건네어 덮어주었다. 나는 그를 계속해서 만났지만 만나자마자 바로 이북을 꺼내 들었다. 그에게 같이 독서를 하자고 한 것을 봉사라 일컫은 것이 민망할 정도로 그 행위를 통해 그와의 관계를 이기적이게 주도할 수 있었다. 그와의 만남에 가차 없이 목적성을 부여시킴으로써 만남 그 자체, 관계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지 않아도 되게끔 했다. 존재로서 충만한 관계였다면 ‘독서’라는 행위에 의존하지 않아도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와 나는 목적을 가진 행위의 매개가 없이는 텅 빈 것이었다. 그의 존재만으로 채우는 시간은 내게 거북스럽게 힘겨웠다. 그를 만난다는 것은 독서를 하는 시간이거나 등산을 하는 시간인 것이지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아니었다. 이북의 전원을 누름으로써 나는 그의 세계로부터 나를 격리시킬 수 있었다. 힘겨운 대화로 공백을 메워야 하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이런 속내를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그가 눈치채리라고도 기대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는 나의 샤를이지 않은가. 하지만 뜻밖에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너는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훨씬 더 초점이 맞춰있는 것 같아.” 그가 알아 차린 것이 불행일까 다행일까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말이 그에게 그리고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은우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은우와 시간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커다란 의미였다. 오히려 내가 욕구하는 행위들을 그는 해줄 수 없었음에도 말이다. 무엇을 같이 한다는 목적성을 가진 적이 없다. 그저 함께함, 그뿐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헷갈렸다. 나에게 있어 독서와 등산은 내가 은우와 결국적으로 하게 되는 어떤 것보다 친밀한 행위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근데 너와 내가 같이 하고 있는 것들이 굉장히 친밀한 것들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너는 그런 생각 안 해봤어?”
“음.”
“어쩌면 두 사람이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보다도 친밀한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이를테면 등산의 경우, 몇 시간 동안 같이 땀을 내며 같은 호흡으로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밖에 없잖아. 산속이라 데이터도 안 터지고, 진짜 상대와 나뿐인 시간이야. 그런 약간의 시공간의 강제성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가장 은밀한 사상까지도 나누게 되기 쉬운 환경이지.”
그는 딱히 동의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누그러진 것 같아 보였다.
“책을 읽는 것은 어떨까. 나는 개인적으로 그 누구와도 몸은 나눌 수 있어. 하지만 같은 책을 읽고 언어를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무나랑은 불가능하다 생각해. 언어를 나눈다는 것보다 한 개인의 온 우주를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것이 없잖아.” 나는 그의 표정에서 그가 기분이 풀어진 것이든 아니든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저 나의 철학을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물론 나의 철학보다는 친밀함이라는 단어, 그것이 주는 특별함이라는 감정이 단지 그를 위로하고 말았을 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적 속 한참 동안 독서에 열중했다.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그에게 물었다.
“둘 중에 누구에게 더 공감해?”
“나르치스랑 골드문트 중에?”
“응.”
“나는 둘 다에게 너무 공감이되. 나는 어쩔 때는 한없이 감성적인데, 어떨 때는 지나치게 냉철하거든.”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대답을 가벼운 소음쯤으로 치부했다. 누구에게나 본인의 성향을 확대해석하려는 성향이 있기에 조그마한 유사성이라도 발견한다면 주인공, 혹은 여러 주인공에게 이입하기 충분하다. 성격검사 결과가 자신에게 부합한다고 지나치게 믿어버리는 현상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둘 중 하나를 고르지 못하는 그의 어중간함에 나는 한 번 더 눈썹을 찌푸리게 되었고 역시나 의견 같은 것은 없는 인간이라 생각하고 말아 버렸다. 하지만 그의 말에 더 귀기울였어야했다. 실로 그는 그에게 진실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해가 지기 전에 저녁을 먹으러 역 쪽으로 다시 향했다.
그가 뜬금없이 웃으며 나 때문에 자기 이름대로 살게 되었다 했다.
“너 이름?” 내가 되물었다.
“한자식 이름은 ‘文山’이야.” 라며 허공에 한자를 써보이며 내게 알려줬다. 글과 산이라,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왜 ‘Sam’이라고 소개해?”
“어려서부터 국제 학교를 다녔기에 영어 이름이 필요했는데 발음이 비슷한 영어 이름을 골랐을 뿐이야. 근데 이제는 본명보다 더 본명 같아.”
“그럼 ‘Roland’는 누군데?” 나는 문득 그의 SNS 프로필에 쓰여있는 이름이 생각나 물었다. 그는 약간의 농담을 하는 얼굴을 하며,
“아, 있어. 걔는 엄청 멋진 얘야.”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로랜드를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