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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oland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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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Mar 29. 2024

3월 6일 요가역

요가역 근처 커피숍에서 책을 읽고 있다 하자 보여줄 게 있다며 쌤이 찾아왔다.


빼곡히 적힌 에세이 두 장. 말하는 것에 솜씨가 없다며 글을 더 선호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해야 한다고 느꼈는지 데미안을 읽은 소감을 써왔다. 책을 다 읽은 후 가볍게 어땠냐고 묻는 말에 어버버 하는 그를 하찮아하는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에세이가 이기적이라 느꼈다. 그 장문의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나의 숙제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상대방의 삶을 어렵게 하는 것은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다. 불편한 인터페이스를 가진 플랫폼은 바로 질타를 받듯이, 복잡한 과학적 이론이 대중의 관심을 받을 수 없듯이 말이다. 그에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는 책을 권한 것으로 나는 충분 이상의 봉사를 했다 생각했다. 


그렇게 그 종이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리고 하는 수 없이 읽어 내렸다.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일차원적 소감을 길게 늘어놓았다. 그 흐리멍덩한 소감은 읽자마자 내 뇌리에 닿지도 못한 채 흐릿하게 사라졌다. 마지막 문장에서 눈을 떼야할 때가 되었을 때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랬구나.”라고 말하며 그저 실망한 티를 역력히 내며 고개를 들며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여태까지 그와의 대화가 썩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줄곧 느껴왔다. 둘 다 어려서부터 영어를 사용했지만 모국어는 아니었기에 그로 인한 언어의 장벽이라고 의심해보기도 하고, 다른 문화권에서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그로 인한 사고하는 속도나 방식의 차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한 인간에게 어떤 종류던 깊이가 있을 거라고 기대해 왔기에 그가 만발의 준비를 해온 글을 다 읽은 순간, 그런 것이 없는 인간도 있다는 큰 실망감을 피할 수 없었다. 때때로 다만 구두화 되지 않은 하나의 고유한 지성이 그에게도 있기를, 그것이 작문화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품었던 희망이 그대로 와장창 깨졌다. 여지껏 나에게 있어 한 인간을 안다는 것은 한 우주를 맛볼 수 있는 특권이자 한 권의 책을 음미하는 과정이었는데. 그렇지만도 실망스럽고 아무런 깊이 없는 책들도 얼마나 수두룩 한가. 


그는 본인의 생각을 일련의 논리 흐름 따라 열거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생각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고, 스스로의 머릿속에 대조되는 두 가지 이상의 목소리들이 있어서 본인도 궁극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해 말을 해야 할지 매 순간 망설이는 것 같았다. 한쪽 입장을 이야기하려 하면 그것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목소리 때문에 머릿속에서 한참의 토론을 거치느라 진이 빠져 입밖으로는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토론을 스포츠로 임해왔던 나로서는 그런 조금의 답답함, 비논리, 근거의 결여, 모순들을 인내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어느 입장이면 어떠한가. 그것이 논리적 우위를 가질 수만 있다면, 설득력만 있다면 그것을 빠르게 취하고 상대와의 대화를 지배해버리고 말면 될 것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말해야 한다는 순진한 규칙을 따르라고 그 아무도 권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너는 나와의 대화에서 정보를 취득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어 보여.”라고 어느 날 그가 꽤나 상처를 입은 태도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것 말고 대화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몰랐기에, 그것이 문제제기라고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는 본인의 생각들을 듣는 이인 내가 연결고리를 찾아서 정리를 해줘야 하는 것이 본인의 책임을 나에게 미루는 것 같아 그의 대화를 건설적으로 깊게 끌고 나갈 능력의 부재가 이기적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그와의 대화가 곧장 피곤했고, 차라리 혼자 책을 읽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불행일까 다행일까, 그의 대화 방식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와 상대방의 대화는 얇디얇은 공통 주제로 아슬아슬하게 엮여 있지만 사실 각자는 혼잣말을 공기 중으로 내뱉기를 할 뿐이었다. 상대가 한 주제에 대해서 깊게 파고들고 싶어 되묻고 여러 각도로 같은 맥락의 소주제를 던져보아도 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같은 주제라고 착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일 때가 많았다. 그에겐 정해진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약간의 연관성만 있다면 그 에피소드를 몇 번이 곤 반복해 꺼냈다. 그것이 맥락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냐 물으면 그는 그저 벙찐 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반문을 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어항 속 물고기 마냥 입을 뻐끔거리는 것에 가까운 얄팍한 대화를 아슬아슬하게 이어갔다. 의미와 깊이에 천착하는 나는 매번 그의 답의 연관성을 되물었고 그의 어리숙한 표정을 마주해야 했다. 그것이 나를 점점 미치게 했다. 


어쩌면 그와 나의 공통분모가 너무 적은 것이 아닐까라는 고심 끝에 나는 쌤에게 같은 책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 앞서는 봉사라 칭했지만 사실 이것은 굶주린 스스로를 돕기 위한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었다. 독서를 같이한다는 것은 공유할 수 있는 언어가 쌓임을 의미한다. 공유하는 언어가 쌓인다는 것은 내가 하나를 말할 때 상대방이 열을 이해하는 것이다. 둘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쾌를 경험할 수 없다 감히 생각한다. 그렇게 그는 데미안이라는 책을 읽게 된 것이었다. 데미안은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책으로 대학생일 때 내게 추천한 이래로 나 또한 주변 소중한 사람들에게 줄곧 데미안추천해 왔다. 누군가에게 추천을 하면 나도 그것을 계기 삼아 다시 읽어보았고 다 읽고 나서는 그들과 꼭 열성적 토론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도정으로 하여금 그 사람과 나는 이마에 표식을 얻게 된 셈이었다. 그 책은 내게 있어 표식을 가진 자, 그리고 표식을 가진 자를 알아보는 사람으로 살겠다 각고하는 것이었다. 


“혹시 아담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알아?” 나는 그의 소감문에서 눈을 떼고 잠시 후 입을 다시 열었다.

“아니. 경제학자 아담스미스 말하는 거야?”

“경제학자로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철학자였기도 했어. 가장 대표작으로 도덕감정론이라는 저서가 있고.”
“무슨 내용인데?”

“그는 모든 경제 주체가 합리적이라는 전제 하에 시장을 설명하잖아. 합리적이라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는, 다른 말로 이기적인 주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음.”

“아담스미스는 시장에서 개개인의 주체들이 이기적이여만 시장이 최선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말했지. 철학자로서 아담스미스는 시장을 초월해 모든 사회 공동체에서 모든 개인이 이기적이어야만 최고의 선의 상태를 이룰 수 있다고 했어. 온전히 합리적인 개개인이 완전한 상태로 이기적일 때에서야 비로소 참된 이타주의가 실현된다 생각했거든. 이를테면 이런 거지, 비비탄을 샀다면 본인 팔에 제일 먼저 쏴보는 것.”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책 제목을 되풀이하며 읽어보겠다고만 답했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내게 최선인 것이 결국 남에게도 최선인 것이란 거야.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선과 악이야. 이 것을 아는 것이 선, 표식을 모르는 것은 악.”


대학교 경제수업이 아니라 철학 수업으로 아담 스미스를 만났을 때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개개인이 참된 의미로 이기적이기를 택할 때야 말로 사회는 집단적으로 도덕감정이 실현된다는 논리는 실로 깨달음의 도가니 같은 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아담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이기적이기를, 이기적이기 위해서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부터 시작하기를 수없이 주장했다. 그는 내게 덕분에 자신을 최우선으로 돌볼 수 있게 되었다며 건강한 이기주의를 알게 되었다고 종종 말해왔다. 하지만 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내가 그에게 전하려 했던 의미는 그에게 도달했을 때 모두 마모되어 10분의 1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와 나 사이에는 짙은 검바다가 있었고 굽이굽이 그 새카만 우주를 통과한 후의 나의 단어들은 완전히 다른 단어들이 되어 그의 귀가에서 춤을 추었다. 그의 말들은 그 칠흑이라는 그와 나 사이의 벽에 흡수되어 절대적으로 내게 도달되지 않았다. 그의 언어와 나의 언어는 끝내 일체화되지 못했다. 그와의 대화는 나를 분노케 했고 나를 시들게 했다.


나는 어쩌면 그에게 하는 주장을 스스로에게도 소리치며 이기적인 것이 건강한 거라는 합리화로 거짓된 삶을 계속하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도덕감정론을 다 읽어갈 때 즈음, 그와 나는 우연히 귀스타브 폴로베르의 마담보바리라는 책을 주어 담았다.

이런 타이밍이란. 쌤는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샤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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