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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oland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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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Mar 22. 2024

2월 28일 신주쿠역

신주쿠 루미네 백화점 쪽으로 걸어 나오는 원준이랑 키아나를 발견했다. 한쪽 어깨끈이 거슬릴 정도로 더 긴 책가방을 맨 원준이 옆 딱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샤넬 롱지갑을 한쪽 손에 든 키아나. 조화로울 것이라고는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둘을 데리고 쌤과 나는 등산을 가기로 했다. 


등산은 은우가 내게 해 줄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다.


둘이 아직 멀치감치 떨어져 있을 때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쌤은 내게 속삭였다. 키아나는 안티백신주의자이기에 백신과 관련된 주제로 대화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키아나는 상당한 우파였다. 그 어떤 당위도 그녀의 자유 앞에 설 수 없었다. 지식인 놀이를 한창 하던 나로서는 마음으로는 그녀에게 동의를 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머리로는 인생 편히 사는 감수성부족한 사람이라고 그녀를 판단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를 레이블링 한 후여서 인지 그녀와 대화거리를 찾기가 당황스러울 만큼 어려웠다. 그녀에게 원준이를 만나게 된 계기, 약혼을 하게 된 도정을 물었다. 그녀는 둘이 처음에 같은 학교 다른 연구실로 이름만 알고 지내는 사이에서 루카스가 주관한 스키장 여행을 계기로 친해졌다 했다. 조치대학교 국제학생들의 관계 속에는 언제나 루카스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장관 하는 작은 독재자, 히틀러 같았다. 

그녀도 나와 쌤의 만남에 대해 물었고, 등산을 자주 하냐 물었다. “같이 등산하고 책도 읽고, 러닝도 종종 해.” 나는 답했다. 그녀는 참 건강하다며 원준이를 집 밖으로 꺼내기도 힘들다 했다. 나는 그녀가 그런 평가를 해주기 전부터 집에서 게임만 하는 그들보다 나와 쌤의 관계가 월등하다는 것을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키아나와 나는 웃는 얼굴로 서로를 대했지만 결코 친해질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직감하며 전철에 몸을 싣고 오르려는 산 근처로 향했다.


환승지에서 다음 전철을 기다리며 플랫폼에서 원준이랑 키아나는 마트에서 산 스시를 먹고 있었다. 아침을 먹지 않는 나와 쌤이었지만 한입도 권하지 않은 채 둘이 먹는 데에 온전히 집중하는 모습을 우리는 그저 바라보았다. 


지난번 쌤은 나와의 등산이 끝나고 SNS에 게시글을 올렸다, ‘Long awaited cardio with my personal therapist.’라는 캡션과 함께. 심리치료사,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이것을 분명히 칭찬이라고 받아들였다. 나는 나의 대화법, 상대와의 소통방법에 능통한 사람임에 은근한 자부심도 느꼈다. 머지않아 내게 씌워진 이 감투가 드리우는 어둡디 어두운 결괏값을 전혀 예지 하지 못한 채. 

그날 짐바에서 타카오로 넘어가는 사이에 나는 쌤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나에게 있어 질문함은 애정 어린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런 동시에 자기 방어적 행위이기도 함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나는 그의 어머니에 대해 물었고 그의 유년기에 대해 물었고 그의 장래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의 답에 대한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으며, 돌아오는 답들에 대해서 되묻기만을 반복했다. 어떤 치우친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그저 사실적 수긍으로만 응했다. 있는 그대로의 답을 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임을 느끼게 했다. 그렇게 상대방의 정보를 면밀히 수집하는 반면 나는 나에 대한 어떤 것도 일절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습관적으로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는 사람이다. 이 대화의 장의 유일한 광대는 당신입니다. 열심히 춤을 춰 보세요. 저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거나 토마토를 던지겠어요,라는 태세를 일관한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안일하다 평한다면 나는 꽤나 억울할 것이다. 질문을 한다는 것에 쏟아지는 에너지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결코 수동적 행위라 여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쌤과의 경우, 나의 의식적 노력 혹은 습관으로 내가 방어적 대화를 취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로 쌤이 내게 어떠한 질문도 일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도 앞으로 여느 날들도.

주고받는 대화가 되지 못한 우리의 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양쪽 모두 주는 역할에 충실했다 착각을 일으켰다. 나는 그에게 말할 기회를, 전폭적인 관심을, 이야깃거리를, 끊기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줬다고 생각한 반면 그 또한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잘 나누지 않는 속내를, 계속된 흥밋거리를 심혈을 다해 나에게 내주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심 그가 내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을 애석하다 느꼈고, 그는 나의 계속되는 질문을 무례하다 느꼈을지 모른다. 

나는 그의 SNS 게시물의 문구를 읽으며 거만하게 그가 제공해 주는 물질적 풍요에 대해 그의 심리상담가 노릇을 자청하면서 그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했다. 


평발인 원준이는 20분에 한 번씩 잠시 쉬어가자 했다. 우리는 잘린 나무줄기가 보일 때마다 원준이를 향해 앉을 거냐, 너를 위한 쉼터가 나타났다며 농담을 해댔다. 그는 장난스럽게 우리를 향해 욕을 하면서도 걸터앉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털썩 주저앉은 그의 모습은 흡사 골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무늘보 같은 것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긴 머리는 멋스러운 장발의 긴 머리가 아니라, 정말로 외출하기를 포기한 사람의 미용실을 가지 못한 모양새였다. 그 늘어진 머리가 플라스틱으로 된 사각 안경을 가려 시야를 불편하게 만든 모습은 그의 볼품을 한층 더 없게 만들었다. 이 친구는 한 여자의 약혼자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키우기 충분한 그런 꼴이었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인가 인간다운 매력이 있는 존재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도저히 다시 일어설 정력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아 보이는 가여운 것에 대한 애정을 나는 느꼈다. 

사랑은 필시 동경으로부터 시작된다 믿어왔던 내게는 정말이지 원준이와 키아나의 약혼은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그들 이외의 사람들은 암암리에 원준이가 키아나를 만난 것을 그의 삶에 있어 몇 없을 행운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장착된 단절감으로 본인의 연구분야에 대한 지적 탐구심과 게임이라는 세계 속으로의 도피가 온 세상인 그에게 키아나는 같은 이공과 대학의 대학원생으로 학문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당한 미모의 게이머걸로서 그의 신체가 허락한 유일한 취미로 보여지는 게임을 함께할 수 있는, 거의 환상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키아나는 원준이의 어떤 것을 동경할 수 있었을까. 혹은 나보다 훨씬 일찍 사랑의 저편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사랑은 가엽게 여기는 마음인 것을. 

문득 그녀가 나에게 지하철 안에서 건강하다 언급했던 것은 어쩌면 내가 전혀 모르는 어떤 세계에서 환상에 가까운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우월감에서 나온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키아나와의 교류를 피하기 위해서 원준이의 페이스에 맞춰 걸었다. 한국말로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했다. 원준이와의 대화는 쌤과의 대화와의 확연히 달랐다. 원준이와 내 사이에 오고 간 말들은 하나의 공을 이루었으며 우리는 번갈아가며 투수이기도 포수이기도 했다. 지난 스무 년간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이 대화법은, 쌤을 만나고는 아주 낯설고 이질적이며 존귀한 경험이 되어버렸다. 

나는 앞서 든 키아나와 그의 관계에 대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원준에게도 그녀와의 만남과 여정에 대해 물었다. 그의 외견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럴지 몰라도, 그의 마음에 상당히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골격을 발견하고 나는 놀랐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 그 자체로 자리한다. 그는 모두가 단정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본인의 가치를 그녀와의 관계에서 찾지 않는다. 그의 겉모습이 다 흐트러저버린 후에도 필히 그의 견본은 굳건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몇 번의 대화로 나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쌤은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원준이와 키아나를 위한 유기농 너트를 그들에게 주며 인분수 대로 챙겨 온 리조토를 조리하는 동안 먼저 먹으라 했다. 나에게도 오늘도 어김없이 고급 샴페인을 건넸다. 이런 쌤의 모습과 누가 쫒아라도 오는 듯 자신의 몫을 차지하기 바빴던 플랫폼에서 스시를 먹던 키아나, 원준이와의 간극이 이상하게 웃겼다. 어느새 쌤과 하나의 쌍을 이루게 된 자신에 익숙해졌는지, 그의 신사다움이 나의 신사다움인 마냥 느끼는 이 우월감이 말이다. 며칠 전에도 루카스 생일이라고 닌텐도 기프트 카드를 구매하던 쌤이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루카스가 그나마 그의 여자친구랑 같이 할 수 있는 게임이 스위치라고. 둘이 같이 좋은 시간을 많이 보내면 좋겠다고. 그런 모습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원래 주변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라고. 나는 운이 좋게 그 주변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을 뿐이라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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