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파티는 저녁 7시 시작이었지만 나는 파티준비를 도와주기 위해 한두 시간 일찍 쌤을 만났다. 그는 흰 셔츠, 회색 베스트, 넥타이에 정장구두를 한 채 큰 캐리어를 들고 역 앞에 있었다. 그의 긴 머리는 왁스로 한쪽 귀에 넘겨진 채 고정되어 있었다.
“정장 입었네.”
“Being presentable as a host.” 라며 그는 본인의 어머니가 여러 파티를 호스트함에 따라 그에 걸맞은 매너를 갖추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했다. 생각해 보니 그의 일상은 신사놀이라도 하는 듯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매너, 예의범절을 중시해 왔다. 나중에 아빠 사업을 물려받게 될지라도 그런 매너가 필수이지 않겠냐고 덧붙였다.
그가 파티를 위해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 숙소로 걸어갔다. 그 숙소는 아주 근사한 3층 빌딩으로 외벽은 미니멀한 회색과 멋스러운 식물들이 정갈하고 대담하게 우릴 반겨주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세련된 주방과 커다란 테라스가 있었다. 커다란 주방 뒤로는 이불을 깔 수 있는 타타미 형식의 평상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침대에 눈길이 닿았을 때 나도 모르게 긴장감을 감지했다. 낯선 남녀가 낯선 숙소에 단둘이 있게 되자 당연하달까, 그는 내게 술을 권했다.
그는 캐리어에서 고급술들을 꺼내며 물었다.
“뭐로 시작할래? 어제랑 같은 거?”
어제도 아이스 박스를 들고 왔던 그다. 요요기 공원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자 내일 파티에서 자신이 만들 칵테일을 시음해 보겠냐며 아이스박스에서 비커 두 개와 리커 두 가지, 믹서 두 가지를 꺼냈다.
“I took some from my lab.”라며 본인의 위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비커를 가리키며 웃는 그였다.
“Some kind of science theme for tomorrow’s party?”
“Perhaps, I will also wear my gown.”
그에게 건네받은 형광 하늘색 칵테일과 그가 본인을 위해 마저 만든 형광 주황색 칵테일은 짠이라는 소리를 내며 잠시 맞대어졌다. 까마귀가 물 주변을 걸으며 울어대는 고즈넉한 요요기 공원의 경치에 시선을 두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가볍게 막걸리?”라고 물으며 고급 막걸리 병을 건넸다. 한국에서도 마셔본 적 없는 막걸리였다. 먹어본 막걸리 중 제일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은우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친구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나는 화장실을 자주 들락날락하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웃핏이 마음에 썩 들지 않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첫 번째로 카즈가 도착했다, 빈손으로. 나는 그날 무엇을 사가야 할지 일주일 내내 고민했는데 말이다. 쌤에게의 선물, 답례, 보은은 늘 어려운 과제였다. 그에게 물질은 너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었고 나에겐 정성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카즈는 쌤과 같은 대학원 생물학 연구실 동기였는데 코로나와 함께 쥐실험실이 문을 닫으면서 퇴학을 결정하고 주식으로 떼돈을 벌어 투자를 본업으로 하고 있었다. 카즈는 지금 이혼준비 중이라고 덤덤히 말했다. 초면이라 구체적인 것은 묻지 못했지만, 결혼에 대해 대단한 회의를 가지고 있었던 내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그의 실패가 뜻밖에 아련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쌤을 통해 카즈의 결혼식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감히 추측해 보겠는데,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맞춰줬을 것이다. 그녀를 위해서라기보다 본인의 무관심에. 그녀는 그의 “친절한" 수동성에 지쳐버렸을 것이다. 그녀에겐 충족되지 않는 욕구가 쌓여갔지만,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카즈에게 말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기대와 당연한 실망이 반복되며 아무런 적극적인 가해 없이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입은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을 것이다. 그와 어우러지지 않는 웨딩 식장, 복장, 어색한 웃음과 대조되는 그녀의 함박웃음이 담긴 그들의 결혼사진은 내게 한 편의 결혼 이야기를 말해줬다.
머지않아 키아나와 원준이가 도착했다. 평발이라 공익판정을 받은 대학원생 원준이. 그와 약혼한 미국인 키아나. 마지막으로 브라질 일본 혼혈 루카스가 도착했다. 캘빈클라인 속옷이 보이도록 내려 입은 청바지에 개구쟁이 얼굴. 흡사 저스틴비버 몸에 헤리스타일 얼굴을 하고 있던 그였다. 그의 존재는 곧바로 나에게 묘한 불편함을 주었고 앞으로 꽤나 자주 만나게 될 때마다 그러했다. 타인에 관심 있는 척 온갖 질문을 하면서 본인의 친화력을 뽐내지만 사실 그는 타인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 나를 만날 때마다 같은 해맑은 얼굴로 호기심 가득한 척, 똘똘한 눈으로 내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것도 수차례. 꽤나 영석하고 쾌활해 보이지만 뼛속까지 자기중심적인 그. 전갈자리인 그. 나는 그가 처음부터 싫었다. 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두 개의 전갈은 있을 수 없다 생각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가볍게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쌤은 묵묵히 저녁을 준비했다. 그는 야채를 손질했고 수프에 여러 조미료를 넣었다. 저녁으로 메인 메뉴인 훠거가 준비되었고 모두가 원탁 모양의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갑자기 천장에 매달려 있던 와인 잔들이 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두 단번에 대화를 멈추고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금방 웃음기를 띤 채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들 일본에 오래 살아서 그런가 전혀 지진의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나도 그저 눈치를 살피며 찰랑거리는 유리잔들을 영상에 담기 바쁠 뿐이었다.
“Who’s idea was it to make hot pot today?”라고 루카스가 물었다. 쌤과 나는 동시에 눈을 마주했다. 루카스의 질문에서 미묘한 불만을 읽은 쌤은 나에게 어떠한 책임의 화살이 가는 것도 원치 않았는지 곧바로 자신이라 대답했다. 최소 자신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맵기로 해주지 그랬냐며, 루카스는 이미 쌤이 본인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이 정도의 맵기의 메뉴를 선택했다는 것을 파악했음을 알렸다. 나는 살짝 웃으며 이 정도가 뭐가 맵냐고, 미묘한 기싸움에서 절대 밀려나기 싫음을 알렸다.
카즈도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존재에 의문을 던졌다. 쌤이 자신의 친구라고만 소개했을 때는, 그것으로 이 자리에 초대받기에 불충분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So, any other connections?”라고 재차 물었다. 그제야 쌤은 나도 같은 학교에서 교환학생을 했으니 모두 동창생 아니겠냐고, 그래서 초대했다고 말했다. 마지못해 수긍했는지 카즈는 곧바로 다른 대화를 시작했다. 그 둘이 내가 이 파티에 자리함에 대해 의문을 가진 것이 썩 불편했지만 나 또한 초대받은 날부터 당일 내내 같은 의구심이 들었다. 쌤은 왜 나를 이 자리에 초대했을까.
저녁을 먹으면서도 쌤은 계속해서 재료 손질을 하고, 수프의 농도를 조절하며 모두의 취향에 맞는 칵테일을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이 식사를 끝냄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리를 떴을 때 혼자 남아 뒷정리까지 잠잠히 해치웠다. 생각해 보면 이 날이 가능하기까지 그의 많은 노력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멋스러운 숙소도 자비로 부담하고, 충족하고도 남을 양의 고급술과 음식 재료도 본인이 준비해 왔다. 그것이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그림이었다. 이 친구들 모임에서 그리고 차차 나와의 관계에서도 그는 언제나 그런 존재가 되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버리는, 받는 것에 미숙한 그런 존재. 주변사람들이 도와줄까라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항상 돌아오는 답은, "All good."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언제까지나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했다.
미리 답을 알려주자면, 정확히 반년만에 자신을 고갈시켜 버린 그는 정확히 이 멤버들과 이즈로 여행을 간 어느 여름밤 혼자 바닷가로 돌아오지 않을 수영을 하러 간다.
원준이로 말할 것 같으면, 외교관으로 추정되는 부모님 아래 자라 어려서부터 이사를 꽤나 자주 다닌 것 같았다. 8년 동안 인도에 살았고, 잠시 한국에 들를 일이라도 있으면, 인도음식에 몸을 재적응시 켜야 하는 것이 그렇게 고역스러웠다며 한국의 급식이라도 감지덕지했다 말했다. 인도에서는 물만 마셔도 구토를 달고 살았다면서. 그런 반면 한국에서는 왕따를 많이 당했다는데 그래서인지 고독과 외로움이 내재된 채 적당히 세상에 숨어 자신의 연구분야인 화학과, 그것 이외로는 비디오게임이 삶의 전부인 것 같았다. 그것을 고려했을 때 스물 초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약혼을 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한국에서 원준이를 만났더라면, 아니, 한국에선 원준이를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두 개의 우주에 교점이라고는 먼지 티끌도 없는 두 사람이었다, 원준과 나는. 외국에 있으니 그나마 한국이라는 상당히 미세한 접점으로 이 날 이후에도 몇 번이나 만날 기회가 있었다. 몇 번의 만남 후 그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어쩌면 그는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꼬마아이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즈로 여행 갔을 때 해변가가 떠내려 갈 정도로 소리소리를 지르던 꼬마를 보며 "I was definitely that kid."라고 말한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계속된 이사로, 그것도 외국으로 수차례 이사를 해야 했던 탓에 그 천진난만한 아이가 겪었을 소외와 혼란, 끝없는 단절감 등으로 스스로를 닫아버려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쌤과 루카스는 원준이가 늘 약속을 취소하고 핑계를 대며 집에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끝내 약속을 늘 취소하는 원준이에 대해서 그들은 성격이 내향적인 것을 어떻게 하겠어, 하고 말아 버리지만 사실 그는 내향적인 사람이 아님을, 학습된 셧다운으로 본인을 지키기 위한 벽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그들과 끝끝내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원준이 중 누가 더 나쁜 친구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철저히 타인인 나도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겠는데 그들은 왜 그것을 보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줄곧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원준이도, 쌤도, 루카스도 그리고 나도 어렸을 적 해외라는 정글로 내 던져 저 생존을 해야 했었다. 쌤은 코스타리카에서 태어났고 몇 안 되는 동양인이었기에 심한 왕따를 당했다. 그는 그때의 일을 아예 기억하지 못한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 시절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었다는 것은 그가 겪었을 트라우마의 크기를 확실히 말해준다. 그 이야기를 내게 했을 때 나는 어쩐지 그의 이중적인 모습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루카스는 자신의 왕따 이야기를 무슨 영웅담처럼 만날 때마다 이야기 해댔다. 브라질에서 왕따를 당해 공부에만 몰두하다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서 모두에게 인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너무나도 두려웠지만 그 이후로는 사회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나. 일본 브라질 혼혈인으로써 브라질에서는 ‘아무런 매력이 없는 공부만 하게 생긴 애’였는데 일본에 와보니 너무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본인도 놀랍다나.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그가 이야기를 할 때면 어땠든 나를 포함해서 자연스럽게 대중의 주의가 그에게 쏠려있음이 사실이었다.
어릴 적 내가 생존해야 했던 혹독한 해외의 경험은, 돌이켜보면 한낱 비굴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생사 앞이라면 정의 따위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나라는 인간이었다. 이제 막 8살, 9살인 어린아이에게 잔혹한 평가가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어린아이들을 정치를, 그 잔인한 놀이를 아직 모르는 것이다.
내가 8살이 되던 해 아빠의 MBA를 따라 보스턴에 2년 살게 되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백인과 간혹 보이는 아시아인이 전부를 이루고 있었다. 백인 아이들이 동아시아인인 나의 친구 무리를 가까이할 일은 없었다. 두 인종 사이에는 국경과 같은 벽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뜻밖의 일로 몇몇의 백인 친구들이 유일하게 나에게 관심을 가져줬다. 그녀들은 나를 생일 파티며 슬립오버 파티에 초대해 줬다. 나는 언제나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비굴하게 처신하는 방법을 깨우쳤다. 그들은 내게 한국에도 아이스크림이 있냐고 물어왔고, 인형이 없으면 맘에 드는 걸 가져가라고도 했다. 백인 사회에 발을 딛게 되자 당연히 동양인 친구들을 굴림할 수 있었다. 그 비겁한 위세로 나는 내가 비굴했던 것만큼 그들에게도 비굴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 위계를 완전히 정복해 또 완전히 정복당한 필히 비굴한 그런 것이었다.
어찌어찌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대가 되었고 다들 스위치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에는 구경을 하다가 새벽이 되어가자 잠이 들었다. 새벽 3시 즘 눈이 떠졌을 때 그들은 같은 자세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미동 없이 그들은 아침을 맞이했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여전히 같은 자세로 게임에 임하고 있는 그들을 보니 어이가 없고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