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Roland 04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인 Mar 09. 2024

2월 7일 신주쿠역

등산을 가기로 해 아침 일찍 신주쿠역에서 쌤을 만났다. 

시부야에서 만났을 때 등산을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며칠 후 등산계획이라며 아주 조금 지나치게 상세한 ppt를 보내왔다. 위치, 시간, 준비물, 버스시간이며 휴식 장소와 맛집까지 정리한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가 준비한 루트는 짐바산을 경유해 타카오산에서 하산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계산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예측 소요시간은 무려 16시간이었다. 물론 그는 만약을 대비한 플랜 비, 씨의 여러 가지 짧은 코스도 준비해 뒀다. 지진상비가방부터 이런 한결같은 그의 성격에 벌써 익숙해진 것인지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런 모습은 내가 종종 마주했던 그와는 너무 달랐다. 그를 관통하는 일련의 일관된 면모들은 단일한 줄기를 이루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주오선 급행을 타고 빠르게 도심을 벗어났다. 일본의 시골스러운 감성에 약간 젖어들었다. 우리는 대체로 침묵하며 풍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 침묵 또한 내게는 점점 익숙해져 가는 그의 습성 중 하나였지만, 어느 때때로 보이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재치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존재였다. 오늘은 어떤 가닥의 쌤을 마주하게 될까, 이상스러운 연구심에 그를 틈틈이 돌아봤다. 나의 시선은 그를 갑자기 자신의 심울에서 꺼내온 듯했다. 내가 할 말이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What?”이라고 물어왔다. 험상궂다면 험상굳은 표정은 한순간 허물어져 순하디 순한 눈망울로 나를 응했다. 나는 “Nothing.”이라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묘한 얼굴을 소유자였다. 가녀린 긴 옆머리가 다 덮지는 못한 그의 작고 날카로운 코가 진하게 풍기는 아담한 우아함과 대조되는 커다란 한 눈. 양옆으로 위아래로 완벽하게 동그라한 그의 눈에서 똑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그의 새카만 눈동자. 늘 자신보다, 자신 앞의 세계보다 더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 눈자위. 분명 동양인의 얼굴이지만도 어딘가 불러일으키는 이질감. 가끔 머리가 시야를 가릴 때면 그 여성미를 한 번에 휘어잡아버릴 것 같이 두꺼운 손가락으로 머리를 귀뒤로 넘기는 것이었다.


한 시간 즘 후, 우리는 개찰구도 없는 한 시골 역에 내렸다. 등산객으로 보이는 몇몇의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불안하게도 한 방향으로 가지 않고 역 근처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ppt에 적힌 대로, 비록 그 길을 택한 사람은 적었지만, 어느 터널을 지났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도 없는 그런 터널을 지나니 산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옹기종기 작은 집들과 텃밭이 있었고, 언제 붙였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 세월을 탄 정당 후보 포스터들이 붙여져 있는 것이 간간이 보였다. 북한산의 입구처럼 스포츠용품 가게들이 즐비한 것도, 설악산의 입구처럼 주차장도, 산의 시작을 알리는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어디로 갈지 몰라 약간의 방황을 하며 정처 없이 걷던 도중 다행히 멀찍이 한 방랑자 같은 중장층의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한 골목을 향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유일한 희망이라 느낀 우리는 그를 따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돌아선 한 골목에는 ‘산곰 주의’와 함께 다소 귀여운 사나운척하는 곰의 그림이 그려진 팻말이 있었고, 산정상이 적힌 화살표가 있었다. 곰 그림을 보며 쌤은 자신의 배낭을 가리켰다. 그곳엔 종이 달려있었다. 만의 하나 곰을 만날 것을 대비해 일회성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이 등산을 위해 베어벨을 구비했다는 것이 참 그답다 생각했다. 그런 괴짜스러운 준비성에 그저 웃음이 났다.


산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았다. 다만 근력운동만 해 오던 그에게 정말 오랜만의 유산소 운동은 빠르게 그를 지치게 했다. 그는 뒤처지는 것이 멋쩍은지 역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며, 예전에는 수영을 꽤나 잘했다는 말을 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그저 웃었다. 누구에게든 과거에 어떠했을 수 있는 무수한 존재적 다양성이 가능하다. 그러니 오늘날 결과로써 보여줄 수 없는 것이라면 옛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다소 냉소적인 말을 그저 웃음으로 대체했다. 


두 시간 정도는 나무가 우거져 전망할 것이 없었지만 곧게 솥은 나무들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정상에 다다르기 직전 상당히 높은 계단이 줄지어 있었고 나는 이제야 조금씩 박동하는 심장을 느낄 수 있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후 한 번에 쉼도, 뒤돌아봄도 없이 단숨에 정상에 올랐다. 계단 아래 자그매진 그가 옷을 벗으며 주섬거리는 것이 보였다.

세월을 잘 탄 멋스러운 가죽 재킷 아래에는 버건디 박스티가 있었다. 티 한 장만 걸친 그의 몸은 상당히 다부진 것이었다. 도심에서 만날 때 그가 착의한 긴 머리와 어울리는 여성스러운 세련미가 돋보이는 아웃핏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언더아머 레깅스와 반바지. 그것에서 느껴지는 거침 또한 그의 다부진 몸, 두꺼운 손가락과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그는 본인의 이중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시간에 맞게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고,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그는 내게 고급 샴페인을 건넸다. 정상은 탁 트인 넓은 평야로, 멀찌감치 그러나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후지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날카롭게 상쾌한 공기,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등산객들의 단란함, 팽창하는 나의 폐와 심장은 나의 몸속 구석석으로 아들레나린을 스며들게 했다. 들뜬 마음으로 건네받은 샴페인을 들이켰다. 탄산 때문에 우리는 빠르게 취해갔다. 저번과 다르게 심히 조용하던 그는 “Better to be just honest? Better to just talk it out, right?”라고 질문을 한채 침묵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의 양과 무게에 비례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짐작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도 입을 다물었다. 끝내 우리 사이에 오고 간 말은 공백뿐이었다. 

이전 03화 2월 4일 산겐자야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