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Roland 0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인 Mar 08. 2024

2월 4일 산겐자야역

"예를 들어, 너에게는 축구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

"응."

"근데, 나는 축구를 할 줄 몰라."

"응."

"너와 내가 연인관계라는 이유만으로 너의 모든 욕구를 해소해 줄 수 없단 말이야."

"그렇지."

"인간은 개성적 존재고, 어떤 종류의 욕구를 어느 강도로 느낄지는 개개인마다 달라."

"응."

"그 모든 개별적 욕구에 대해서 한 명의 파트너가 해소시켜 줄 수는 없어.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이고 우리는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은 채 그 다채로운 욕구를 다양한 객체들과 해소해 왔어. 너는 동호회를 가입해서 주말에 축구를 하겠지. 그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아."

"응."

"그런데 그 욕구가 성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마치 잠시 저 논리와 이성을 잃은 사람 마냥 굴어. 그건 왜일까? 분명히 네가 성적으로 욕구하는 것, 그것의 빈도, 그것의 모양이 내가 욕구하는 방식과 다를 텐데, 왜 연인관계에 임하는 한 쌍은 퍼즐조각 마냥 딱 들어맞기를, 서로에게서만 그 욕구를 해소하기를 기대하는지 모르겠어."

그는 잠시 침묵했지만 긍정의 눈빛을 유지했다.

"나는 내가 네 모든 욕구를 해소시켜 줄 수 없음을 알아. 그것이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든, 누군가와 다른 형태의 잠자리를 갖는 것이든. 그 두 욕구는 최소 내게 있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내가 동호회 회원들과의 축구를 허한다면, 다른 누구와의 잠자리도 허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납득이 된다 생각해."

그의 표정은 어떤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나의 두 눈을 응시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너에게 해소되지 않은 어떤 욕구가 잔존한 상태로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네가 내게 이를테면 축구를 하고 싶다고 말하듯,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말하듯 제 삼의 누군가와 어떤 행위를 하고 싶다는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공유하고 행해 나아갔으면 좋겠어. 그리고 너도 나에게 같은 것을 바라주었으면 좋겠고."

그는 잠시 나에게서 시선을 옮긴 후 안경을 올리며 생각할 틈을 가진 후 말했다.

"음. 그렇다면 너와 나의 이 관계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어? 많은 관계들은 배타성에서 그 의미를 찾곤 하잖아. 아니, 배타성이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배타성을 위한 배타성을 우선하는 관계가 지속가능할까? 배타성이 주는 거짓된 안정감과 특별함은 관계가 끝나버린다면 결국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어? 건강한 관계의 지속가능성, 그것이 관계에 임하는 사람들의 최우선 이어야 해. 지속되었다는 것보다 관계에 부여할 수 있는 더 큰 의미가 있을까?"

그는 다시 침묵했고 나는 이어갔다.

"해소되지 않는 욕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고개를 들어내기 마련이라 생각해. 나는 우리 관계에 그런 병을 키우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서로의 욕구를 바라보고, 존중하고 해소해 나아가는 것이 지속가능성의 유일한 방법이지 않을까."


나는 은우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를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나는 그와의 관계를 어떤 것보다 소중히 했다. 깨뜨릴 수 없는 논리로 꽁꽁 싸매서라도 보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 만큼 모순적으로 그가 나만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그이만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배타성 따위가 우리의 관계에 어떤 작은 불협화음도 일으킬 수 없다는 철저한 신뢰가 있다는 반증이라 믿었고 그 논리에 잠식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그런 시험에 오른 두 사람, 그와 나의 이런 대화를 사랑했었다. 깨질 수 없는 우리의 관계를 나는 온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산겐자야역에 도착해 약속한 출구로 가니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는 쌤의 모습이 보였다. 늘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게 습관이라며 시계를 5분 일찍 설정해 두었다고 멋쩍게 말했다. 우리는 말고기 집으로 향했다. 둘 다 메뉴를 전혀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를 와해하고자, 일본은 이전에 안전사고 이후로 소고기를 날로 먹지 않고 말고기만 날것으로 먹는다는 기사를 본 적 있었다고 말했다. 그도 적당히 공기의 흐름을 바꾸려 사실 자기는 5년 전까지만 해도 한평생을 채식주의자로 살았다고 했다. 대학을 일본으로 오고 나서는 더 이상 사회생활이 어려워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아직 힘줄이나 질긴 고기는 씹는 게 낯설고 딱히 유쾌하지는 않다 하며 말고기 사시미의 대부분을 내게 권했다. 한국에서도 육회를 좋아해 자주 먹었는데 처음 먹어본 말고기도 상당히 맛있다 느끼며 사양 없이 위별 다른 식감과 그에 맞게 페어링 된 다양한 소스를 즐기고 있었다. 


"I must appologize for my inappropriate behavior last time."라고 느닷없이 그가 입을 뗐다. 

나는 그가 무엇에 대해 사과하는지 전혀 모르는 척 동그란 눈을 뜨고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About?"

"I should have not grabbed your arm like that."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아도 된다 말하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았다. 그의 행위가 실제로 내게 미친 지대한 영향을, 그 여파에 비례하는 만큼 아무렇지 않았음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


나는 그를 그만 만나는 것이 좋겠다는 강한 징조를 느끼고 있었다. 그 징조가 너무 강렬해 하루라도 빨리 그에게 진 빚을 떨쳐버리고 싶어 그를 불러낸 것인지, 징조가 틀렸음을 스스로에게 입증하고 싶어서 또다시 그와 자리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벌써 두 차례 신세를 지며 오늘은 기필코 저녁을 사리라 다짐하며 집 밖을 나왔던 나지만,

"I just have been taught this way." 

절대로 상대를 대접해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다며 강경하게 계산서를 가져갔다. 그러나 이 또한 나의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전 02화 2월 1일 시부야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