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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Roland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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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Mar 02. 2024

2월 1일 시부야역

요츠야역에 사는 그를 요요기역으로 불러내서 사쿠라신마치역까지 같이 가게 하고 다시 본인 집으로 돌아가려면 아마도 교통비만 만원이 넘게 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교통비를 계산한 게 웃길 정도다. 그는 남에게 베푸는 것에 있어 몇 만 원 즘은 아무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애초에 돈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고맙고 미안한데 새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줄게 있다며 엄청 큰 가방을 하나 건넸다. 그 가방 안에는 비상식량, 비상물, 비상약, 헬멧, 손전등, 비상지도, 보온매트 등 생존에 필요한 온갖 것들이 들어있었다. 맨 아래에 재난방지 가이드북을 꺼내 들기 전까지 나는 이것들이 무엇을 위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맞다, 일본은 지진의 나라였지. 

평소에 안전둔감증이 심했던 터라 도쿄에 살게 된 이래로 지진에 대한 우려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이상한 건지 완벽하게 타인인 나의 안전을 이렇게까지 대비하는 그가 특이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쌔끈하게 검은 가죽 가방, 그 안에 든 온갖 위험 상황을 고려한 물품들. 

그의 검정 재킷. 검정 매니큐어, 중지의 타투. 그것은 확실히 일관된 그의 자취였다. 

그렇다면 나를 새 집으로 데려다주며 보여준 어딘가 나사가 빠진 것 같은 그는 누구였던 것인가.


집까지 가기 위해서는 시부야역에서 덴엔토시선으로 갈아타야 했다. 시부야역이 크고 환승선로가 많아 복잡한 것은 맞지만 6년 이상 도쿄에 거주한 그가 덴엔토시선을 찾지 못해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습에 나는 퍽 당혹스러웠다. 그뿐일까, 급행을 타버리는 바람에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기도 했다. 지하철 안에서 줄곧 심각한 표정으로 허리를 반정도 숙인 채 두 손을 깍지로 모으고 건너편을 응시하던 그는 도대체 무슨 깊은 철학을 하고 있던 것인가. 내려야 할 역이나 잘 봐줬으면 하는 나의 소망은 그의 아득한 사색에 조금도 포함될 겨를이 없어 보였다. 일본어가 전혀 익숙할 리 없는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도 안내되고 있는 현 역의 이름이 들리지 않았는데, 나의 집에 도착한다라는 목표는 그의 수심에 잠식당한 지 오래인 듯했다. 돌고 돌아 내려야 할 역에 내렸을 때 나는 외계어와 다름없었던 새 집으로 가는 지도를 그에게 보였다. 혼자였더라도 전혀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길을 전혀 볼 줄 몰랐고, 일본어를 읽지 못했다. 덕분에 우리는 남의 집을 침범하기도, 완전히 다른 부근을 헤매기도 했다. 그 무능한 모습은 어딘가 익숙한 당혹감과 함께 몇 년 전 그와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이 수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이 그래프 경향을 봤을 때 타당하다 생각하는데.” 어느 때와 같이 어쩔 수 없이 침묵을 깨며 그에게 물었다.

“아, 그래프 경향을 보니 이 수치가 타당하겠네.”라고 불필요하게 주섬주섬 내가 한 말을 되풀이하기만 한 그의 대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것은 지루하다 못해 듣는 이를 분노케 하는 어떤 것이었다.


물론, 내가 그를 의아해하는 만큼 그도 나에 대한 당혹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자기가 가야 할 집도 모르는 채 지인에게 모든 걸 맡겨버리는 그 무책임한 해맑음에. 누구의 무성이, 누구의 무지가 더 경악스러운 것인지 종종 생각하게 된다. 누구의 의아함이 더 타당한가에 대해서.


어쨌든 고마워서 밥을 사겠다고 그를 불러냈다. 시부야역에서 나를 기다리는 그가 보였다.

남색 카디건, 비비안웨스트 티셔츠와 매트한 검정 가죽 부츠가 조화롭다고 생각했고 손에 든 아이스 박스로 시선이 갔다. 

“아이스박스에 뭐 들었어?” 

“막걸리. 인스타 보니까 네가 막걸리 좋아하는 거 같길래.” 그렇게 대충 밥을 먹고 공원에 가서 막걸리를 마셨다. 코로나 때문에 열려 있는 음식점을 찾기 어려웠고, 덕분에 길을 배회하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네덜란드에 가서 대마를 세 대나 피고 미술관에 갔는데 그림이 움직였다던가, 본인에게 늘 긍정적이게 살기를 상기시키기 위해 楽라는 손가락 타투를 받았다거나, 아빠가 취미로 오토바이를 수집하는데 그 때문에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져서 한 달 동안 고구마만 먹고 지낸 적이 있다던가. 대만에 있는 집는 대저택에 하녀가 있는데, 엄마가 그녀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등 그는 마치 스크립트를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연하고 위트 있게 대화를 리드해 갔다.


공원에서 막걸리를 다 마셔갈 때 즘 둘 다 가벼운 취기를 느끼며 근처 바로 향했다. 

뭔가가 심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바에 도착해 나는 와인을 시켰고, 그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Wine at a bar? Take advantage of the bartender.” 

어딘가 머쓱해져 나는 평소에 마시지 않는 양주 칵테일을 주문해 갔다. 그렇게 서 네 잔이 빠르게 비워지고 오후 일곱 시가 되기도 전에 우리는 아주 거하게 취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모노가미의 현실성에 대해 물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결혼이 적합한지 물었고, 사랑의 배타성의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열창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겠다고 그의 옆을 지나는데, 그는 내 팔을 잡더니 그대로 나에게 기댔다. 둘 다 취기 때문인지 힘 조절이 잘 되지 않았고 나는 순간적으로 모든 게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에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역시나 뭔가가 심히 잘못된 거 같다는 나의 촉이 옳았다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짐을 옮기는데 도와줘서 고마움에 밥을 사주겠다고 불러 칠천 원짜리 밥을 사주고 십만 원어치 술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한참을 울었다. 아주 소중한 것이 와장창 깨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때 이미 끝난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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