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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Roland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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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Mar 15. 2024

2월 13일 하라주쿠역

하라주쿠에서 슌을 만났다.

“일본에 온 지 한 달 된 거지?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 너는 잘 지냈어?”

“나 겨우 졸업하고 너네 회사에 지원했다가 서류에서 떨어졌잖아.” 라며 그가 웃었다.

“정말로?” 예의상 놀란 척을 해주었다.

“근데 어찌어찌 광고대행사에 붙어서 요즘은 촬영한다고 여기저기 바쁘게 출장 다니고 있어. 꽤 재미있어.”

“다행이네.”

“새로운 사람은 없고?”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나를 힐끗 돌아봤다.

“그게 말이지.” 나는 은우에 대해 말해야 할지 쌤에 대해 말해야 할지, 또 쌤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눈을 피했다.

“역시.” 그는 픽 웃어 보였다.

“너야말로, 새롭게 만나는 사람 생겼어?” 

“사실 생겼어. 안 그래도 이 남자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니까.”

샤부샤부 가게로 향하는 중 슌은 내게 그 남자에 대해 조잘조잘 이야기했다. 가게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마자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누군데.”

“2년 전에 조치대학교 다닐 때 수업을 같이 들었던 사람인데, 학기가 끝나고는 거이 연락도 안 하고 지내다가 이번에 다시 도쿄에 오게 되었을 때 짐 옮기는 거 도와준다고 해서 만나게 되었어. 그러다가 같이 밥 몇 번 먹고 술도 마셨어.”

“Is he cute?” 다른 긴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이 그는 바로 질문했다.

“음 뭐랄까. 장발에 옷 잘 입고, 중지에 타투가 있어. 이 사람이 이사도 도와주고 비상용품이라고 이것저것 엄청 많이 챙겨주고,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이미 여러 번 신세를 졌는데. 어떻게 돼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사실 계산을 절대 못하게 해. 그리고 선물을 하자니 풍족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어차피 마음의 표현인데 뭐든 어때.” 그의 말이 맞다. 무엇 때문에 이리 고민하는가. 문제 삼고 있었던 경제적 여건의 차이는 핑계일 뿐, 나에겐 그에 대한 정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한 편 그가 제공해 주는 편의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그 호의에 대한 책임을 일절 지고 싶지 않은 일그러진 속내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점심을 먹고 슌은 다른 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며 가버렸다. 시간이 뜨자 나는 바로 쌤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랍게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순차인 듯 생각과 행동이 그렇게 흘렀다. 그에게 만날 수 있냐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그는 단숨에 하라주쿠역으로 왔다. 곧장 내가 있는 곳으로 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라는 감정은 스스로에게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시간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람인가,라는 의문이 무의식 속에 뿌리내렸다. 그 뿌리는 그 자신의 돈에 대한 존중도 없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퍼져나갔다. 자신이 존중하지 않은 것을 남이 존중해 줄 리 없다는 냉소적 생각이 스쳤다. 그를 만날 이유를 정당화하려는 것의 연장선일까. 알 수 없었다.


분명한 한 가지는, 이미 그는 내게 있어 시간이 날 때 만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말은 시간을 내서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데자뷔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우와 연애를 시작하기 전 일 년 정도도 그와 관련된 일정은 캘린더에서 일절 찾아볼 수 없다. 가장 많이 만났던 사람인데도.


그런 생각을 하며 쌤과 함께 요요기 공원을 향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횡단보도에 우리는 팔깃이 닿을 듯 닿지 않을 듯한 밀도로 걷고 있었다. 순간 건너편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고, 나도 모르게 쌤과의 지근거리에서 튕겨져 나왔다. 건너편에서는 친하게 지내던 입사동기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귀엽게 생긴 어떤 여자의 손은 잡은 채 즐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려는 순간 나는 어떤 이유에서 고개를 돌려버린 채 걸음을 빨리했다. 


부끄러움이었다, 이 감정은. 그 찰나의 행동이 이렇게 개념화되면서 나는 실로 난감했다.


그 마음은 왠지 사춘기를 되살아 내는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한 번쯤 엄마가,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동생이 부끄럽다고 생각하고는 괜스럽게 그 마음을 어쩔 줄 몰라 짜증을 더럭 내버리게 되는 그런 미숙한 마음. 나의 날 것이 들춰진 것 같다는 생각에, 그 취약함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 어리숙하게 휘둘러 버린 칼날 같은 마음. 누군가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을 극복하는 것은 미숙한 자의 숙제다. 아니, 그 누군가는 필히 자기 자신이다.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자아를 규정지으려는 비독립적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불온전성, 불확실성을 타인에게 전가해 그들을 부끄럽게 여기게 된다. 그 비독립성으로 친구를 소외시키기도, 만나는 사람을 고치려 하기도 하고, 가족을 숨기려고도 한다. 자아가 비어있을수록, 그 관계성 밖에서 본인의 존재를 확립하려는 독립의 노력이 결여될수록 타인에 대한 기대, 실망과 좌절, 스스로에 대한 취약함이 농도 깊어 간다. 내가 쌤이 부끄럽다 느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잠들어있던 내 안의 미성숙함이 깨어났다는 것. 쌤이라는 존재가 나의 몫이 되었다는 것. 이 마음은 아마도 용서받지 못할 그런 마음일 것이다.


이런 어지러운 현실을 예고 없이 맞닥뜨린 것은 실로 난감 그 자체였다. 옆에서 내일 있을 신년 파티에 대해 설명하는 쌤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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