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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재 Apr 02. 2022

님아, 그 소프넛을 마시지 마오

‘자기야, 냉장고에 들어있는 거 사과주스 아니었어? 맛이 이상해….’     


  결혼식 몇 주 전에 있었던 일이다. 예비 신랑만 먼저 신혼집에 들어가 살고 있었는데 밤 10시에 저런 메시지가 온 것이다. 자려고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그걸 보고 튕기듯 일어나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인가 신호음이 가다가 그가 전화를 받았다.     


“그거 마셨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사과주스인 줄 알고 한 모금 마셨는데 맛이 이상했어.”     


심지어     


“나 목이 아파….”     


…미치겠다.     


  내가 낮에 냉장고에 넣어 두고 온 것은 사과주스가 아니었다. 소프넛이라는 열매를 끓인 물이었다. 나름 잘 안 보이는 구석에 놓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밤에 배고팠던 남자는 그걸 찾아내 마셨다. 급한 마음에 인터넷에 ‘소프넛 마셨을 때’라고 검색하고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며 훑어봤지만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정보가 있을 리가. 결국 신혼집 근처 응급실이 있는 병원 주소를 검색해서 그에게 보내며 계속 아프면 꼭 가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그의 통증은 잦아들었고 그 밤의 일은 엉뚱한 해프닝 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소프넛을 볼 때마다 그때의 당황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남편 탓을 할 수가 없었던 게 소프넛을 끓인 물은 정말 사과주스와 똑 닮았다. 연한 갈색을 띤 그 액체에 코를 갖다 대면 살짝 새콤한 향마저 피어오른다. 거기다 결정적 이유 하나 더. 자원 재사용을 한답시고 주스 유리병 라벨을 떼고 씻어 소프넛물을 담아놨었다. 누가? 바로 내가. 원흉은 나였구나.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다.


  삼 년 전 신혼집 입주를 준비하며 제일 오래 고민했던 품목은 소파도, 식탁도 아닌 세제였다고 말한다면 우스울까? 마트에 가면 다양하고 고운 빛깔의 세제들이 내가 집어 들어 주기만 기다리고 있어도, 그걸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더 손에 순하게 닿고, 더 물에 잘 분해되고, 덜 쓰레기가 나올 것을 찾는 과정에서 조그맣게 개구리가 그려진 어느 해외 브랜드 세제나 순 비누 성분을 그대로 분쇄했다는 어느 가루비누 같은 것들이 물망에 올랐다가 내려가곤 했다. 조선 시대 왕세자빈을 뽑던 삼간택(三揀擇)보다 더 치열한 제로 웨이스트 경합 끝에 우리 집에 도착한 건 소프넛 한 자루였다.


소프넛(Soapnut)은 무환자나무에서 열리는 동그란 열매다. 실제로 보면 쪼글쪼글하게 마른 모습이 작은 대추 같기도 하다. 이 열매가 이름처럼 세정력을 가지고 있는 비결은 껍질에 함유된 사포닌이다. 물과 만나면 신기하게도 제법 거품이 일어난다. 한 번 쓰고 버리는 것도 아니다. 사포닌 성분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재사용할 수 있다. 


  소프넛을 가장 간단하게 쓰는 방법은 통에 물과 열매를 담아 흔들어 거품을 내는 것인데 만약 좀 더 농축된 세정력을 원한다면 소프넛을 물과 함께 끓이는 방법도 있다. 냄비에 물을 2L 정도 붓고 소프넛을 열 알 정도 넣어서 불을 켜고 끓어오르면 약한 불로 줄여 30분 정도 끓인다. 이때 발산하는 열에너지를 아끼려 뚜껑을 덮고 끓이면 보글보글 거품이 넘쳐서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참사가 일어나므로 주의해야 한다. 물론 내 경험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에 관해서라면 진심으로 궁상맞은 나는 여러 실험 끝에 에너지 낭비도, 대참사도 막을 수 있는 절묘한 타협점을 찾으니 소개하겠다. 


  자기 전에 냄비에 물과 소프넛을 넣고 뚜껑을 열고 끓인다. 물이 끓어오르면 불을 끄고 뚜껑을 덮는다. 그 열을 최대한 오래 가두어 놓기 위해 뚜껑 위엔 수건을 접어 올려놓는다. 그러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완성된 진한 소프넛 물이 고요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식어있는 소프넛 물을 바로 냉장고에 넣어 보관하면 끝, 적은 에너지로도 간단히 끝나고 계속 불 옆에서 지켜볼 필요도 없으니 정말 만족스럽다. 끓였던 소프넛 열매는 건져서 바짝 말리면 좋고, 아니면 냉동 보관해도 괜찮다. 이런 식으로 두세 번 더 쓸 수 있다. 작은 주의 사항이 있다면 동그란 열매를 으깨서 속에 있는 진까지 빼낼 필요는 없다는 것. 으깨면 재사용도 어렵고 어차피 세정 성분은 껍질에 있다.


  소프넛이란 재간둥이는 실로 다양한 장면에서 활약한다. 우선, 기름기가 많지 않은 설거지를 할 때 비누 대신 사용할 수 있다. 단, 시각적으로 시원하게 거품이 이는 것을 기대하진 말아야 한다. 작은 거품 방울이 보글, 일었다가 곧 사그라들어서 영 미심쩍을 것이다. 하지만 설거지를 다 끝내고 보면 뽀득, 제법 제 몫을 하니까 믿어도 좋다. 


  오염이 많지 않은 빨래를 세탁할 때도 유용하다. 나는 수건끼리 모아서 한 번에 세탁기를 돌리는데 수건은 일반적인 방법처럼 섬유 유연제를 써서 헹굼을 하면 좋지 않다고 한다. 물 흡수를 방해한다나? 그래서 소프넛을 쓴다. 소프넛은 사과주스를 닮은 새콤한 향에서 알 수 있듯 약산성이라 따로 유연제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부드러워지는 신묘한 세정제다. 세제 넣는 자리에 소프넛 물을 한 컵 부어 줘도 되고 더 간단히 하고 싶을 땐 조그마한 면 주머니에 소프넛 대여섯 알을 넣고 단단히 묶어 수건과 함께 던져 넣은 후 불림 코스로 세탁하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소프넛의 일반적인 활용인데, 호기심이 많아 주체를 못 하는 나는 추가 실험을 몇 가지 더 했다. 화장실에서 소프넛을 쓰면 어떨까? 


면으로 만든 다회용 화장 솜을 꺼내 소프넛물로 적셨다. 촉촉해진 그것으로 얼굴을 문지르니 베이지색 화장품 흔적이 묻어 나온다. 물론 마스카라나 눈화장에는 역부족이겠지만 선크림이나 간단한 기초화장을 지울 땐 소프넛 물을 클렌징 워터 대신 사용할 수 있다. 


그다음에는 소프넛 물로 머리 감기를 실험해봤다. 2018년에 인터넷을 바짝 뒤지며 사전 조사를 했음에도 아무 정보를 발견할 수 없었던 걸 보면 내가 최초까진 아닐지라도 나름 ‘한국 소프넛으로 머리 감기 계’의 선구자 축에는 들지 않았을까 감히 자랑해본다. 


먼저 두피와 머리카락을 물로 촉촉하게 적시고 소프넛 물을 조금씩 두피에 뿌리면서 손가락 지문 부분으로 문지르며 마사지했다. 거품은? 거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설거지하며, 수건 빨래를 하며, 화장을 지우면서 소프넛의 능력을 봤기에 믿음을 잃지 않고 두피를 씻어 나갔다. 근데 아뿔싸! 소프넛 물 한 방울이 또르르 두피에서 이마로 굴러와 눈썹을 지나 눈에 들어가 버렸다. 갈색의 순한 물처럼 생긴 녀석이었는데 눈에 들어가니 비누처럼 화끈하게 존재감을 과시한다. 너무 따가워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 틈으로 눈물까지 주르륵 흘러나온다. 아, 남편이 소프넛 한 모금을 마셨을 때, 이 액체가 점막을 타고 내려갔을 때 바로 이렇게 아팠겠구나. 화장실에서 홀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마음속으로 남편에게 진심을 담아 사죄했다. 하지만 울면서도 손은 바지런히 머리 감기를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쏴아아, 물을 틀어 두피와 머리카락을 헹궈낼 때 깜짝 놀라버렸다. 나오던 눈물마저 쏙 들어갈 만큼.    


‘뭐야, 너무 부드러워….’     


이전에 약산성이라고 자랑하던 샴푸바들을 두어 개 써본 적 있다. 하지만 소위 그 ‘약산성’ 샴푸바로 머리를 감아도 머리카락이 조금은 뻣뻣해지기에 린스바니, 트리트먼트바니 저마다 짝꿍이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소프넛은 달랐다. 자연에서 온 진짜배기 약산성으로 머리를 감자 린스나 트리트먼트 없이도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리고 거울에 바짝 붙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치며 두피를 꼼꼼하게 살폈다. 기름기 없이 깨끗한 상태다. 재간둥이 소프넛, 이번에도 소리 없이 제 몫을 한 것이다. 이 재미난 머리 감기 방법은 아쉽게도 여름 한정. 방부제가 없어서 냉장 보관이 필수인 소프넛 물이라서 여름 외 계절에 머리를 감으면 너무 춥다. 봄, 가을, 겨울엔 소프넛 대신 든든한 비누로 머리를 감는다. 하지만 지구가 묵묵히 공전해 다시 푹푹 찌는 여름이 찾아오면 가끔씩 소프넛 물을 꺼내 가장 차갑고 가장 순하게 머리를 감곤 한다.


소프넛은 언제까지 재사용할 수 있냐고요? 힌트는 후각이다. 소프넛 열매에 코를 대봐서 콤콤한 그 특유의 냄새가 사라졌다면, 그때가 끝이다. 일반 쓰레기로 버리면 되지만 그마저도 만족스럽지 않은 제로 웨이스터는 모종삽을 챙겨 나갔다. 화단 구석에 작게 구멍을 파서 맡은 소임을 훌륭히 다 한 소프넛을 묻어 주고 다시 흙으로 덮었다. 동그마한 봉분까지 세우진 않지만 그래도 괜히 모종삽으로 툭툭, 땅을 평평하게 고르며 그동안 수고한 소프넛에게 나만의 작별 인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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