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크가 조크든요~

韓 소위 = 美 소령?

by 재룬

벚꽃나무가 긴 겨울을 버티고 작은 봉우리를 빚어내고 있을 무렵, 여기 아직 신임소위 딱지를 떼지 못한 나는 1MCRC 속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발에 땀나게 일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주와 대구를 떠나, 오산 사람이라는 게 더 익숙해져 가던 어느 날. 1팀장님께서 한미연합연습에 파견 갈 인원을 선발 중이니, 희망자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셨다. 순간 눈동자에 생기가 한 바퀴 빙그르 돌았다.


얼른 1팀장님께 가서,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내가 이 연합연습에 반드시 가야 하는 이유를 막 줄줄 나열했다. 그랬더니 웃으시며 알겠으니까 걱정 말라고. 알고 보니 희망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마감될까 봐 우다다 뛰어갔었는데, 막상 가보니 티켓이 띵동 하고 튀어나온 상황. 살짝 민망..


연합연습에 2~3주 정도 파견을 다녀오면 위로휴가가 많이 나와서 인기가 많기도 하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낯선 곳에서 고생도 많이 하기에 호불호가 갈리는 모양이었다. 그냥 작전실에서 하던 거 하고 싶은 사람도 반, 뭐든 좋으니 작전실을 좀 벗어나고 싶은 사람 반. 운 좋게 우리 팀에는 지원자가 나뿐이었다.


Road to 'Freedom Shield'

매년 전/후반기 각 1회씩 정례적으로 진행되는 한미연합연습. 연습 명칭인 Freedom Shield(FS)에는 한미연합이 이 땅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뜻과 '방패'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이것이 방어적 성격을 띤다는 뜻이 담겨있다. 늘 이 무렵이면 북한은 우리가 미국과 손 잡고 북침 연습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박이다.


연습에 파견되기 전, 슬슬 뉴스에도 이번 한미연합연습에 대해 보도가 되기 시작하니 가슴이 웅장해졌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 영어 때문에. 일상 영어야 손발 써가면서 어떻게든 소통이 되겠지만, 군사작전에 쓰이는 영어는 낯설어서 부랴부랴 관련 자료들과 작전사령부에서 발간한 좋은 책 하나로 벼락치기를 했다.


연습 직전이 되니 구체적인 파견부서가 정해졌다. 자세히는 언급 못하지만, 적군도 아군도 아닌 중립 성격의 부서로 배치되어 의외였다. 치열한 전투를 함께할 거라 생각했는데, 블루도 레드도 아닌 화이트라니.


어쨌든 한 자리에 모인 우리 팀.

유일한 소위였던 나는 당연히 막내였다.


팀원들은 성남, 청주, 오산, 강릉 등 전국 각지에서 오셨더라. 게다가 사무실 반대편에는 실제로 미 본토에서 지구 반대편인 한반도까지 온 미군들까지. 그 우람한 덩치들에 압도되었지만, 한국 공군을 대표해서 왔으니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해 보이려고 애썼다.


곧이어 각 분야 별로 앞으로 2주 동안 동고동락할 한미 양국 카운터 파트끼리 서로 인사하는 '아이스 브레이킹' 시간을 가졌다. 내 카운터 파트는 미국 버지니아에서 먼 걸음 해주신 베테랑 소령이셨으며, 과거 조종사로서 비행을 하다 지금은 지상작전 파트에서 근무하고 계시다고 했다.


정찰기를 조종하셨다고 하는데, 그 항공기에 그 조종사더라. 덩치가 정말 엄청나셨다. 난 조그마한 신임소위였는데 큰일이다.. 앞으로 이분과 항공통제 파트에서 2주 동안 연합작전을 한다니.. 입은 예아 예아 하며 유쾌하게 웃고 있었지만 내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스 브레이킹..? 난 그냥 멘탈이 브레이킹 되고 있었다.



본격적인 연합연습이 시작됐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팀은 적군도 아군도 아닌 중립이었던 덕에 연습 진행상황을 넓은 시선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우리 항공통제 파트 관련 사건들이 있으면 미측에도 공유를 해줘야 했는데, 그때마다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침착하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작문했다. 나름 몇 차례 중얼중얼 리허설도 거쳐 나의 카운터 파트에게 가서 얘기하고 오면 진이 다 빠졌다. 휴.. 다행히 의미가 전달된 듯. 군사영어는 어렵고 낯설었다..


훌륭한 통역병들이 있었지만 나는 내 카운터 파트에게 좀 더 신뢰를 주고, 스스로의 영어 실력을 발전시키고 싶어 통역 없이 직접 의사소통을 했다.


하지만 사무실 저쪽에서 카운터 파트가 뭘 물어보러 오실 때면 그렇게 긴장될 수가.. 내가 먼저 말 거는 거야 뭐 내가 내용을 정해서 가는 거라 그나마 괜찮았는데.. 그래도 나의 느린 영어도 천천히 경청해 주셨고, 매번 웃으시며 엄지를 척해주셨다. 무한한 감사..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나. 이제 임무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됐고, 카운터 파트뿐만 아니라 다른 파트의 미군과도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조금씩 농담 따먹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미측을 보면 그쪽은 항상 싱글벙글이었다.


기억나는 장난이 몇 개 있는데, 아마 연습이 절반 정도 지날 때라 좀 지쳤을 때였을 것이다. 아침 댓바람이었는데, 갑자기 미측 팀장님이 사무실 문을 벌컥 열며 양손을 들고 뛰어 들어오셨는데,


Everybody Panic!!

(얘들아 큰일 남!!)


한국군, 미군 할 것 없이 다들 미어캣처럼 팀장님을 봤는데, 멀뚱멀뚱 두리번거리며 '구라고 별일 없지?' 하고 태연하게 아침인사를 하며 출근하셨다. 아 ㅋㅋ.. 실제로 연습상황이 매일 급변하던 때라 깜짝 놀랐고, 어이가 없어서 사무실 모두가 이마를 짚고 한참 웃었다. 그날은 다들 하루 종일 그 생각에 싱글벙글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지켜보면, 다들 지쳐서 사무실 분위기가 좀 가라앉을 때 누군가 뜬금없는 조크(Joke)를 날려 다 같이 꺽꺽 거리며 웃을 때가 많았다. 우리 한측도 적잖이 드립도 치고 웃고 그랬지만, 미군 특유의 그 박장대소는 궤를 달리했다. 웃음소리만 들어도 자연스럽게 따라 웃게 되더라.


그들의 조크 문화를 겪어보니, 적당한 농담은 촉진제가 될 수 있더라. 설령 그게 개드립이더라도 어이가 없어서 좀 웃고 나면 그런 게 또 나아가는 힘이 된다.


작전은 엄중하게 하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너무 경직되면 부러지기 십상. 완급조절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조크로 한 번 이완시켜 주니 그게 윤활유가 되어 환기된 집중력으로 임무가 또 잘 되더라. 부럽다.. 우리에게도 그런 게 스스럼없는 날이 올까?



연습 마지막 날.


마치 학창 시절 졸업식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은 선배님들과 유쾌한 미군들 덕분에 너무나도 즐겁게 했던 연습이기에 다시 자대로 돌아가기 많이 아쉬웠다. 이렇게 연합연습이 끝나는 날은 암묵적인 국룰로 카운터 파트끼리 기념품을 교환한다고 한다.


나는 소령님께 뭘 드릴까.. 고민하다 이 사무실의 유일한 소위였으니 기억하시기 쉽게 나의 철제 소위 계급장 하나를 준비했다.


그렇게 뒷정리가 한창이던 사무실. 나는 작은 소위 계급장을 들고 쭈뼛쭈뼛 누가 봐도 할 말 있는 사람처럼 소령님께 다가가 작은 선물을 내밀었다. 소령님은 유심히 보다 내 옷깃에 있는 계급 모양과 같은 형태임을 보시고 그제야 반박자 늦게 내 계급장임을 눈치채셨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 주변 동료들에게 자랑하시며 자기 옷깃에 바로 부착하셨고, 이대로 미국까지 갈 거라고 하셨다. 덩치가 커다란 곰 같은 분께서 이 작은 계급장 하나에 이렇게도 좋아해 주시니 감개무량했다. 나도 신이 나서 소위 계급장의 의미와 그 아래의 무궁화에 대해서도 소개해드렸다.


그러자 더 놀라운 선물을 해주셨는데, 바로 본인 모자에 붙어있던 미 공군 소령 계급장을 떼어 내게 주셨다. 나는 놀라서,


오늘 모자 못 쓰셔서 어떻게 하시려고..


어차피 여기서 나 뭐라 할 사람 없음 ㅋㅋ


짬소령의 위상은 대단했다.


내가 그 계급장을 받아 들며 웃으며 'Too heavy..' 하니, 소령님은 진지한 얼굴로 'You too!' 라고 해주셨다. 韓 소위와 美 소령 사이.. 상당한 시간 차이가 있지만 그 무게는 같다고 해주시다니. '존중'이란, 그런 거였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실 소령님에게 조금 과장하자면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포부를 말씀드렸다. 내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뉘앙스를 풍기자 소령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지하게 내 얘기를 경청해 주셨다.


우리는 이 기지 어딘가의 벽에 쓰여있는 문구, '우리는 오천만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말을 명심한 채 근무하고 있으며, 이곳 한반도는 연습 상황처럼 때론 매우 위험하고, 때론 매우 평화롭다. 나는 거기서 이 땅의 자유를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겠다고 했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 언젠가 이 계급장을 보시면 '저 멀리 한반도에 젊고 작은 소위가 한 명 있었지..' 하고 기억해 달라고 했다. 어깨를 툭 치며 물론이라고.


마지막으로, 이번 연합연습이 마지막 근무셨던 센터장님의 이취임식이 간단하게 열렸다. 예비역 장군이셨던 센터장님께서 그간의 소회를 털어놓다가 그만 눈물이 차올라 목이 메어 말씀을 이어가기 힘들어하셨다. 모두가 숙연하게 지켜보던 그때, 옆에 있던 부센터장님이 삿대질을 하며


이 사람 진급 했으면 여기 안 왔음 ㅋㅋ


예비역 장군에게 매운 드립을 치면서 눈물의 이취임식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고 센터장님도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유쾌하게 남은 말씀을 마치시고 뜨거운 박수갈채 속에 직을 내려놓으셨다. 유머에 진심인 이 사람들.. 진짜 미친 듯이 매력 있다. 이런 건 우리도 좀 들여왔으면 좋겠다.


그래, 웃기면 웃자.

가오 좀 잡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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