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Mission!

비행의 일부가 된다는 것

by 재룬

그렇게 이제 소위라는 보호막 없이, 1MCRC에서의 야생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소위는 막내라서 배우기 바쁘다면, 중위는 좀 결이 다르게 바빴다. 이제 중위답게 맡을 수 있는 임무들이 늘어나기도 했고, 소위들을 교육해야 하기도 했고. 중위로 불리는 건 기분 좋았지만 대부분 일 시키기 위한 부름이었던 건 함정. 별 수 있나? 일 해야지.


그 무렵 나는 흔히 이야기하는 '일 하는 기수'였기에 경험이 폭발적으로 부여되기 시작했다.


작전실에서 조종사들과 호흡하며 '통제사' 본연의 임무를 하기도 했지만, 어쩌다 보니 지휘부에서 문서도 작성하고 브리핑도 해보는 등 지휘관 옆에서 뭔가 장교 본연의 업무 같은 일들도 했다. 둘 다 항공통제장교로서 매우 의미 있는 일들이라 느꼈고, 그렇게 나는 우리 조직에 좀 더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일을 배우고 일을 하는 게 즐거웠기에 출근할 때도 이게 출근한다는 느낌이 좀 덜했다. 작전실에 가면 어느덧 친해진 선배들이 있고, 고생 많은 후배들도 있고, 무엇보다 얼굴만 봐도 웃긴 내 동기들이 있다. 그 입구를 들어서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하루를 시작하는 그 기분이 나는 너무 좋았다.



오늘은 또 어떤 임무들을 하게 될지 설레던 나날들. 출근하면 마치 뷔페에라도 온 듯 작전실 여기저기 즐비한 브리핑 자료들을 보면서 어느 자리에 앉을지 어슬렁거렸다. 처음엔 좀 쉬워 보이는 임무를 찾아가다가 점차 자신감이 붙자 조종사의 브리핑 자료가 괴랄한 자리만 찾아다녔다. 그런 장문의 브리핑일수록 그 말미에는


※ 정통급 통제사로 배정 부탁드립니다.


라는 문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중요한 임무이니, 잘하는 통제사랑 임무하고 싶다는 뜻. 조종사 개인적으로 중요한 임무일 경우 이렇게 콕 집어 요청을 해주시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요청이 들어 있으면 부끄럽지만 못 본 척 브리핑 자료를 소리 없이 내려 두고 다른 임무를 하러 갔다. 그러나 요즘은 간이 커져서 이 말을 우리 조직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기꺼이 참전하고 있다.


소령급으로 구성된 편대 속 10여 명의 고참 조종사들의 임무를 성공시켰을 때의 보람은 이루 말로 못한다. 여러 대의 전투기에서 활활 타버린 항공유가 의미 있게 증발했음을 생각하면 더욱.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음침했던 나는 작전실 구석에서 씰룩씰룩 자주 웃었다.


특히 고난도 전술을 연구하기로 유명한 부대의 임무라면 더욱 내가 가서 하려고 입맛을 다셨다. 그야말로 하이 리스크 - 하이 리턴. 그분들이 작성해서 주시는 자료를 여러 개 보다 보면 조종사들이 어떤 순간에 어떤 정보를 간절히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덕분에 닳도록 배운 '표준'이라는 것의 장단점에 대해 스스로 논할 수도 있었다.


그놈의 표준을 준용하기 위해 긴박한 타이밍에도 내가 배운 대로 교범의 표준만을 고수해 교신을 길게 잡아먹기보다는, 비표준이더라도 이 조종사가 간절히 요청하는 그 정보만을 간결하게 전달해 그 임무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표준을 정확하게 숙지한 상태에서 적절한 비표준을 섞는 것이지, '어 누가 이렇게 하던데..' 하며 무지성으로 비표준만 남발하는 건 무식한 거다. 이 둘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이것에 대해 누군가 내 뒤에 서서 배점표에 펜대를 굴리며 '음.. 표준은 이러이러한데, 틀렸구만' 하며 감점하신다면 몇 점이고 좋으니 감점하시라. 난 이 임무를 조종사와 함께 성공시키는 게 더 중요하니까, 감점해라.


대신 비표준과의 화려한 합작을 위해서 더욱 교범을 공부해야 했다. 틀리게 쓸 거면 알고 틀려야지? 틀리기만 하면 그게 바로 빈 수레가 요란한 꼴 아닌가. 박살내서 고물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게.



항상 고난도 임무가 끝나면 조종사가 착륙하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됐을 즈음 꼭 전화를 걸어 나의 임무통제가 어땠는지 물어봤다. 조종사들은 거의 백이면 백 나보다 선배라 전화를 걸 때 좀 긴장되긴 하지만 대부분 MCRC 통제사로부터 온 전화를 반가워하신다. 서로 공중에서 주파수로 업계 용어로만 소통하다 이렇게 한국말(?)로 대화할 때면 나도 신기하고 즐겁다.


오늘 비행 고생하셨다고 운을 떼며 임무 간 들었던 의문들에 대해 여쭤보면, 다들 10분이고 30분이고 그 자리에서 열띤 설명을 해주셨다. 내 예상이 맞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듣기도 하고. 작전실 환경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드리기도 하고. 떠들다 보면 시간이 휙휙 지나간다.


모 F-15K 조종사께서는 퇴근 후 아이를 한 팔에 안고서 내 질문에 한참 동안 친절하게 답변해주시기도 했고, 모 F-16 조종사분과는 밤 12시 무렵 서로 안 자고 있어서 낮에 했던 편대군 훈련에 대해 30분 가까이 노가리를 곁들인 전술토의를 하고 웃으며 다음에 공중에서 또 보자고 했다.


그러다 언제였을까, 한 소령님께서는 본인이 비행을 10년 했는데 MCRC 통제사한테 먼저 전화 온 게 처음이라 신기하다고도 하셨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하며 웃긴 했지만, 10년 만에 처음이라.. 그 자체로 흥미롭긴 하지만 한 편으론 씁쓸하기도 했다.


조종사-통제사 간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야 서로의 환경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더 나은 임무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텐데. 다들 다음 임무하기 바쁘니 그게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뭐, 좋은 기회가 또 있지 않겠나. 기대해 본다.



어쨌든 그렇게 지내다 보니 핸드폰에 조종사들의 연락처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고, 가끔 카카오톡의 업데이트된 프로필에 그분들이 뜨면, 조종사들이 화면 너머의 영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나와 같이 소중한 일상을 가진 사람들임을 실감한다. 항상 그들의 안전비행을 기원하게 되고, 나도 좀 더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요격통제는 잘 안 되면 죄송합니다 일지 몰라도, 항적분리는 잘 안 되면 거기다 분석과 조사가 들어가는 수가 있으며, 무엇보다 동료의 생명이 위험해진다. 내가 뭐라고 이들의 일상과 행복에 위해를 가할 자격이 있나. 좀 더 책임 있는 통제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다 불현듯 드는 생각. 병적이라 해도 될 만큼 안전을 철저하게 점검하여 이륙하는 조종사의 절실한 그 한 번의 비행. 내가 감히 그 비행의 일부가 될 자격이 있는가. 이륙하기 한참 전부터 정비사, 조업사들의 구슬땀을 받고 뜬 그 항공기에 걸맞은 지시를 하고 있는가.​


과몰입 같긴 해도 한 번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의미 없는 비행, 그냥 하는 비행, 중요하지 않은 비행은 없다. 모두가 저마다의 이유로 최고의 서비스를 받아 안전하게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비행의 일부가 된다는 것..​

그 의미를 항상 생각하면서 일하자.


가끔 바쁘지 않을 때 전투기 편조를 임무주파수로 넘겨드리 전, 그 끝에 내가 한 마디 붙이는 말이 있다. 백이면 백 'Thank You!' 라는 메아리가 돌아오는 마성의 한 마디. 오늘은 글을 통해 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전해본다.


Good 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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