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기타만을 치기 위해
그렇게 통기타를 사기 위해 용기 내어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했던 롯데리아.
퇴근 무렵엔 온몸에 고기 패티와 소스 냄새가 진동을 배었고, 마감을 할 땐 오늘 하루 동안 패티를 굽거나 감자를 튀기고 나온 폐기름을 처리하다 보면 손에 기름 냄새가 어우.. 비닐장갑을 껴도 소용이 없더라. 가끔 샤워를 해도 냄새가 좀 남아있다.
밤 10시쯤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가게 밖에 나오니 내 몸에서 나는 기름 냄새가 더 도드라졌다. 얼른 집에 가서 씻어야지.. 녹초가 됐지만 발걸음은 총총 빨랐다. 왜냐하면 집에 가면 기타를 만질 수 있으니까..
꿈에도 그리던 기타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이것 때문에 쌩고생하고 있지만 이것으로 또 회복되어 일하러 갈 수 있게 되는 무한동력. 그렇게 통기타를 선불해 주신 엄마에게 졌던 빚을 야금야금 갚아나갔다.
사실 꼭 갚으라고 하진 않으셨지만, 이제 수능도 끝났겠다, 내 나름 어른 행세를 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예비 스무 살인 나는 무턱대고 '사주세요' 하기 싫었다. 나는 패티를 굽고, 굽고, 또 구웠다.
일단 통기타를 품에 안긴 했는데, 뭐부터 해야 하지? 인터넷에 통..기..타..치는..법.. 이렇게 정직한 검색도 해봤지만 텍스트와 그림, 화면 속의 영상 만으론 이해가 어려웠고, 무엇보다 이게 지금 맞게 하는 건지 잘 몰라서 불안했다.
그러다 수능이 끝나고 좀비(?)들만이 남은 고3 복도에서 떠들다가 그 실마리를 찾았다.
옆반에 이미 기타를 좀 치는 녀석이 있었는데, 처음 1~2개월은 무조건 학원 가서 대면 코칭을 받으라는 것. 현장에서 계속 자세 교정을 받아야 초반부터 올바른 습관을 들일 수 있다며 시내에 있는 한 기타 교습소를 추천해 줬다. 마침 아파트 옆 통로에 살던 초중고 동창인 친구도 기타를 막 시작하려던 때라 바로 스카우트했다.
전화해서 기타 배우고 싶은데 언제부터 가도 되는지 상담을 받고, 며칠 뒤 그 기타 교습소 앞에 도착했다. 간판을 보니 선생님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운영하고 계신 학원이었는데, 거기서 뭔가 간지가 느껴졌다. 상당한 실력자일 것 같아 입구에서부터 그 아우라에 좀 짓눌렸다.
짤랑짤랑거리는 종이 달린 현관문을 살며시 열고 학원으로 들어갔다. 살짝 위쪽을 보니 한 글귀가 담긴 액자가 걸려 있었다.
겸손하고 순수한 열정으로
오..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뭔가 멋있었다. 수려한 붓글씨로 쓰인 이 한 줄짜리 글귀는 장차 소년의 기타 인생 전반에 걸쳐 그 마음을 지배하는 중심축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겉모습은 생각한 것보다 평범한 분이셨다. 굉장히 내추럴한 옷차림과 뿔테안경, 그리고 회색빛 더벅머리에 중간중간 뻗친 흰머리와의 조화가 일품이셨는데, '선생님' 보다는 '사부님'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장인의 기운이 물씬.
정리하자면 딱 봐도 한평생 음악만을 해오셨을 것 같은 분. 포크음악을 사랑하시는 우리 사부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씨익 웃으며 들어오라고 하셨고, 거북이 등딱지 같은 기타 가방을 내려 들고 뒤따라갔다.
이어서 가벼운 신상파악을 겸한 스몰토크가 시작됐다.
쌤: 자 앉으시고.. 몇 살이에요?
나: 다다음 달에 스무 살이에요.
쌤: 오, 수능 끝났겠네? 어디 고등학교?
나: ○○고..
쌤: 오호, 남고생이 수능 끝나고 기타를 배운다, 의도가 불순한데? 뭐 대학 가서 한번 꼬셔보겠다는..
나: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ㅋㅋ
쌤: ㅋㅋ 그럼 기타는 왜?
나: <슈퍼스타K3> 때 버스커 버스커 보고..
쌤: 아~ 그때 여기 진짜 미어터졌지.. <동경소녀> 가르쳐 달라고.. 그게 어떻게 치던 거더라, 아마..
그 자리에서 옆에 있던 기타를 집어 들고 바로 연주를 시작하셨고,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 사부님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 직접 제작하신 교본을 가지고 첫날이니 가벼운 수업부터 시작했다. 아주 기본적인 것들, 기타를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부터 알려주셨고, 왼손은 일단 내가 가르쳐주기 전까지 절대 쓰지 말라며 일단 오른손부터 잘 따라와 보라고 하셨다.
근음과 멜로디의 차이, 엄지의 위치와 범위, 그리고 나머지 손가락들은 각각 어떤 줄을 튕겨야 하는지 배우고, 직접 해보는데 이게 좀 이상하다. 분명 내 손가락인데 자꾸 지들 맘대로 움직였고, 꼬여서 파르르 떨기라도 하면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막 나왔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만큼의 작은 소리로 오늘 배워온 걸 계속 반복했다. 언젠가 반드시 장범준처럼 날아다니며 기타를 치는 날이 오리라 굳게 믿고서.. 야밤이었으니 아주 살살 줄을 튕겼다.
오른손이 어느 정도 안정되니 슬슬 왼손의 기본에 대해 차근차근 알려주셨고, 역시 그 범위와 손가락의 기울기, 손가락을 떼는 타이밍 등에 어느 정도 숙달되자 사부님께서 연습곡 숙제를 내주셨다.
이름하야 <산토끼>. 천진난만한 동요처럼 보이지만, 그때 나에겐 여느 오케스트라 교향곡과 다르지 않았다. 비장하게 산토끼를 잡으러 출발..
집에 와서 교본을 보며 <산토끼>를 연습하는데, 이 빌어먹을 자식이 깡충깡충 뛰면서 도무지 잡힐 기미가 안보였다. 빡침에 드러누웠다가 다시.. 손끝이 아파서 또 한참 쉬었다가 다시.. 그래도 1~2시간 동안 그것만 하니 산토끼 뒤통수가 잡힐랑말랑 했다.
하루 종일 산토끼 뒤꽁무니만 좇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됐다. 엄마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셨고, 나는 보여줄 게 있다며 엄마를 불러 세웠다. 오늘 하루 지겹도록 연습해서 한이 서린 <산토끼>를 들려드렸고, 어설픈 연주였음에도 엄마는 현관에서 가방을 툭 내려놓고 물개박수를 쳐주셨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그게 내 첫 공연이었다. 즐거웠다. 수능 문제 풀어서 맞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보람. 갈고닦은 음악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박수를 받는 건 신묘한 경험이다. 한 번으론 부족했고, 앞으로도 계속 느끼고 싶었다.
그저 버스커 버스커를 향한 팬심으로 시작했던 기타. 이제 또 다른 이유가 생긴 것. 연습에 박차를 가했다.
계획했던 2달이 지나고, 어언 2월이 됐다.
원래도 친구의 추천대로 1~2달만 기본기만 배우고 나머지는 내가 치고 싶은 곡들을 자유롭게 연습하려 했는데, 강의가 너무 유익하고 사부님이라는 인간 자체가 숨만 쉬어도 재미지신 분이라 2달 하고도 조금 더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추가시간에 추가시간도 이제 끝. 고향을 떠나 대학교 입학식을 맞아 기숙사에 미리 올라가야 해서 나에게 기타라는 우주를 안겨주신 사부님과 헤어질 시간이 됐다. 마지막 수업 때
아~ 딱 지금 같을 때 진도 쭉쭉 빼면 팍 느는데..
너 대학 1년만 꿇으면 안 되나 ㅋㅋ?
ㅋㅋㅋ 나도 사부님의 노하우를 좀 더 전수받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뮤지션답게 음악으로 달래야겠지. 별 수 있나.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드리고 손 흔드는 사부님을 뒤로한 채 학원에서 빠져나왔다. 쩝, 아쉬워라.
이후 대학교 올라가는 날까지 유튜브에서 내가 칠 수 있을 만한 곡들을 골라 그 강의 영상을 보며 독학을 했다. 친구들이 1월 1일 지나서 민증 들고 술 마시러 갈 때 나는 기타 치느라고 방구석에서 기어 나오질 않았다.
버스커 버스커 - <잘할 걸>
로이킴 - <봄봄봄>
이적 - <하늘을 달리다>
'비긴 어게인' OST - <Lost Stars>
'원스' OST - <Falling Slowly>
입문곡으로 국룰인 곡들이고, 칠 수 있는 곡들이 늘어나는 게 너무 재미있고 보람찼다. 초반엔 나 이제 ○개 칠 줄 안다 라며 그 개수까지 셌다. 풋풋하죠? 몇 가지 기억 안 나는 게 있지만, 대략 이 정도 치다가 대학교에 갔다.
이제 정말 살림살이 다 싸서 대학교 기숙사로 올라가는 날. 아버지께서 그 멀리까지 태워다 주시기로 했는데, 내가 가는 길에 잠시만 기타 학원에 들르자고 했다.
그 이유는 학원에서 배운 걸 복습하다가 수업 횟수를 세어보니 내가 지불한 학원비보다 수업을 한 번 더 들었더라. 1회분의 돈을 덜 낸 것. 사부님도 워낙 후리(?)하게 지내시는 분이라 아마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신세 많이 졌던 분인데, 이런 건 확실하게 하고 가야지. 나는 1회분에 해당하는 돈을 챙겨 익숙한 계단을 올라 성큼성큼 학원으로 들어갔다.
쌤: 어! 너 뭐야. 진짜 1년 꿇었어?
나: 아 ㅋㅋ 아뇨 아뇨. 제가 돈을 덜 냈더라고요.
쌤: ??
나: 세보니까 1번을 더 들어가지고.. 이거 받으세요.
쌤: 아니 1번을 가지고.. 뭐 10번은 빵꾸난 줄 알았네~
나: 에이 그래도.. 저 이제 위에 올라가요. 얼른요.
쌤: 참나.. 됐어요, 됐어. 자, 그럼 그 마음을 내가 그 돈으로 살게. 그럼 됐지?
서로 넣어둬 넣어둬 하다가 나는 악수만 꽈악 하고 봉투를 들고 나와야 했다. 나오는 길에 보인 그 의미불명의 글귀가 담긴 액자, '겸손하고 순수한 열정으로'. 그 뜻을 여쭤보고 왔어야 했는데, 무릎을 탁 쳤다.
대학교로 가는 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열정이야 뭐 당연히 기타 열심히 치라는 거고, 왜 하필 겸손.. 왜 하필 순수.. 안 그래도 고3 내내 국어에 자신이 없었던 내게 좀 어려운 문제였다. 멍하게 창 밖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 엇, 혹시 그런 뜻 아닐까?
여기서 '겸손'이란, 기타를 잘 치는 사람은 세상에 수도 없이 많고, 그 기술의 완성이란 끝이 없다. 따라서 본인이 어느 정도 잘 친다고 느껴도, 사실 그건 잘 치는 게 아니니까 겸손하게 낮은 자세로 더욱 연습에 매진할 것.
그리고 '순수'란, 사부님과의 첫 만남 때 농담을 치셨듯 이성친구를 한번 꼬셔보려고 기타를 친다거나, 돈이나 인기와 같은 세속적인 동기가 아닌, 정말 순수하게 기타만을 치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주할 것.
물론 내 생각이고, 나름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1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믿고, 내 기타를 그렇게 다뤄오고 있다. 아쉽네, 떠나기 전에 사부님과 소주라도 한 잔 하고 오는 건데. 그럼 그 자세한 철학을 엿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달리고 달려 드디어 캠퍼스 정문을 지나, 스무 살을 보낼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온 사방이 표준어를 쓰는 사람들, 그 속에서 내향형 촌놈인 내가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공부도, 사투리도 아닌 바로 기타였다.
통기타는 나를 밴드 동아리로 데려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