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調和): 한 데 어울림

긁고, 긁고, 긁었던 봄

by 재룬

항상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설레던 스무 살의 봄.


그렇게 개강(開講)으로 개 강해진 청춘들은 미친 듯이 바쁘다. 인싸라서 그런 게 아니라, 3월에는 교내 행사가 엄청나게 많다. 마치 빅뱅과 함께 우주가 작은 점에서 폭발적으로 팽창했듯, 술자리가 비 오듯 억수같이 쏟아진다. 물론 '개강총회(개총)'라는 간지 나는 이름으로.


다음은 개강 즈음 열렸던 행사 리스트다.


1차 정모

2차 정모

신입생 OT

단과대 개총

학과별 개총

2학년 대면식

3학년 대면식

4학년 대면식(+ 대학원생)

동아리별 개총


개총을 거쳐 학년별 학과 대표(과대)를 선출하기도 하고, 학과 운영 관련 공지와 신입생, 편입생, 복학생들의 자기소개도 이루어진다. 물론 여기까지가 공식적인 일정이고, 핵심은 뒤풀이다.


개총이 끝나면 강의실에서 나와 미리 섭외해 둔 술집으로 이동해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된다. 물론 학년별로 선배들을 처음 뵙는 '대면식'은 애초에 모이는 장소가 술집이다. 그렇게 소주가 넘실대는 강을 건넌 청춘들 중 누군가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기도 하고, 집에 오더라도 어떻게 왔는지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내 얘기는 아니다.


물론 옛날처럼 후배들에게, 특히 신입생에게 강압적으로 술을 먹이는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술잔을 내빼기도 좀 그래서 주량이 그리 세지 않음에도 선배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도대체 왜 그러고 살았을까? 스무 살에게 술이란 뭐길래?


그렇게 한 잔, 두 잔, 한 자리, 두 자리 모두 참석하다 보니 어느덧 월말에 계획된 동아리별 개총이 다가왔다. 가입을 희망하는 동아리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공식적인 동아리원이 될 수 있었고, 학술 동아리, 농구 동아리, 밴드 동아리 등에 복수 가입도 가능했다.


나의 경우 통기타를 늘 혼자 연주했다 보니 다른 악기들과 합주를 해보고 싶어서 일찌감치 밴드 동아리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이미 수많은 행사 뒤풀이로 간을 혹사시키고 '내가 다시 술 마시면 진짜 개다 개'라고 짖으며 다녔지만, 밴드.. 꼭 하고 싶으니까.. 비장했던 나는 초코우유와 숙취해소제로 위장을 코팅하며 인간과 개 그 사이의 끔찍한 혼종이 되어갔다.



그렇게 밴드 동아리 개강총회가 있던 날.


수많은 술자리에서 수 만 번 잔을 부딪힌 뒤에야 오늘에까지 왔지. 드디어 악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음악 이야기를 실컷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렸고, 장범준도 대학에서 밴드 멤버들과 인연을 맺었듯 나 또한 그런 운명적인 동료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오전, 오후 수업 동안 강의실에서 여러 대화를 엿들어 보니 그래도 적지 않은 동기들이 오늘 동아리 개총에 오는 것 같더라. 나는 혹시 기타 한 번 쳐보라고 할 수도 있으니 어떤 곡을 선보일지 고민도 해봤다. 공연하는 것도 아닌데 그게 뭐라고 긴장이 되던지.


저녁 하늘 어스름할 즈음, 개총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밴드맨들이 삼삼오오 어느 강의실로 모여들었다. 어차피 잠시 후 자기소개하러 앞에 나가야 했으나 글쎄, 위기를 느끼면 구석에 숨는 동물적인 본능일까? 우리는 맨 뒷자리에 뭉쳐 찌그러져 있었다.


드디어 다가온 자기소개 순서. 쭈뼛쭈뼛 앞에 나가 뭐라 뭐라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암튼 지난 몇 차례의 행사로 다들 이미 구면이었으니 자기소개보다는 왜 하필 기타를 골랐는지, 버스커 버스커를 왜 좋아하는지,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은지 새내기 특유의 꼬질꼬질한 말투로 수줍게 털어놓았다.


10년이 지나는 바람에 동아리 멤버들끼리 어떤 대화가 오갔었는지는 머릿속에서 휘발되었지만, 그 몽글몽글했던 마음만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취향이 같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나누는 대화란 참 즐겁더라.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 밴드가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각자 소개를 마친 뒤, 동아리장 선배가 이번 1학기에 계획된 주요 공연을 로드맵 형태로 제시해 주셨고, 가장 급한 공연은 바로 5월에 있을 축제에서의 무대라고. 모인 김에 어떤 곡을 연주할지 즉석에서 골라보자고 하셨다. 밴드 동아리가 겉보기엔 좀 거칠어보일지 몰라도 그 선곡 과정은 꽤나 질서 정연했다.


일단 개개인이 희망하는 곡을 쫙 받고 곧바로 투표에 부쳐 3곡을 뽑았다.


Radiohead - <Creep>

MUSE - <Time is running out>

버스커 버스커 - <벚꽃 엔딩>


축제에 올릴 곡이니만큼 일렉기타를 쓰는 록 2곡과 앵콜이 나오면 다 같이 떼창을 할 수 있는 어쿠스틱 1곡. 그렇게 위의 3곡이 결정되었다.


<벚꽃 엔딩>은 덕후답게 이미 연주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2곡은 통기타를 치던 나와 거리가 있는 록인 데다 제목만 얼추 들어본 곡이었다. 그래도 록 입문으로 대표적인 곡들이니, 다들 걱정 말라고..


동아리 소개와 각자의 음악 취향을 들으면서 여기는 록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는데, 선곡 리스트를 보니 사실이었다. 버스커 버스커와 같은 어쿠스틱 밴드를 추구하던 나의 이상향과는 그 궤가 조금 달랐지만, 장범준도 일렉기타를 치지 않는가. 이 또한 거룩하신 그분의 발자취를 좇는 일이리라. 나는 수긍했다.


근데 일렉기타는 쳐본 적 없는데..

어떡하지? 통기타랑 많이 다른가?


이런 물음표를 한가득 품고 술집으로 이동해 음악인들답게 뒤풀이에서 흥을 마구 돋우기 시작했다. 딥하게 대화를 나눠보니 각자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천차만별이었다. 뭐라고 뭐라고들 하는데 솔직히 알아듣기 어려운 밴드들의 이름들.. 그렇다고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순 없으니 그냥 허허허 거리며 함께 웃었다. 그래, 차차 알아가면 되지. 하하..



다음날, 드디어 동아리의 정식 멤버가 되었으니 동기들과 합주실에 처음으로 가봤다. 이번 새내기들은 어쩌다 보니 악기 파트별로 골고루 들어온 덕에 고학번 선배들 중 시간 되는 분을 찾는다거나 외부에서 용병을 구할 일은 없겠다며 선배들이 감격하셨다.


합주실은 동아리방(동방)이라 불리는 우리 단과대 뒤쪽에 있던 작은 컨테이너였는데, 고즈넉했던 동방은 겉보기엔 초라해 보여도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 앰프, 마이크 등 합주에 필요한 건 다 있었다. 벽에는 그동안 섰던 공연들의 포스터가 즐비했고, 너덜너덜한 것이 오히려 록밴드스러운 멋이 있었다. 다만 청소가 좀 필요해 보이긴 했다.


축제까지 1달 반 정도 남았으니 어제 고른 곡들을 얼른 연습해 보기 위해 <악보바다>에서 몇 천 원 내고 악보들을 뽑아왔고, 합주실의 공용 일렉기타를 들고 생애 처음으로 록이란 걸 연주해 봤다. 일렉기타를 좀 아는 친구가 이래저래 세팅을 도와줬고, 시원하게 갈겨보니 그 찌릿찌릿한 전자적인 선율이 사나이 가슴을 울리게 했다.


Radiohead와 MUSE의 명곡이 내 손 끝에서 재생되는 그 기분은 참 신묘했다. 유튜브에서 강의 영상과 악보를 보니 고난도의 기타 솔로가 들어간 곡이 아니었기에 연습만 하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한 가지 기술 빼고.


트레몰로(Tremolo)

'한 음이나 여러 개의 음을 빨리 되풀이하여 떨리는 듯이 연주하는 방법'이라는 뜻의 주법이다. 쉽게 말해 일렉기타 연주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긁는' 주법. 그동안 통기타로 끽해야 스트로크나 아르페지오를 해왔던 내게는 좀 진입장벽이 높은 기술이었다.


피크를 쥔 오른손을 박자에 맞게 긁느라 온 신경이 그쪽으로 가는데, 왼손도 그에 맞게 정확한 음을 짚어야 해서 꽤 곤욕이었다. 게다가 조금만 방심하면 피크를 놓쳐버리기 일쑤였고, 설상가상으로 긁는 주법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너무 힘이 들어갔는지 기타 줄도 2번 정도 끊어졌었다.


수 백 명이 보고 있는 축제 무대에서 이러면, 졸업할 때까지 조리돌림 당하지 않을까..? 게다가 선배들이 우리 동아리는 희한하게 공연마다 꼭 한 번은 기타 줄이 끊어지는 징크스가 있다고.. 올해는 설마 나..?


심지어 <Creep>과 <Time is running out> 모두 트레몰로 주법이 들어갔는데, 그걸 실전에서 2곡 모두 연달아 실수 없이 해낼 자신이 없었지만, 눈에 불을 켜고 연습 중인 다른 동기들을 보면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기에 틀리고 틀리고 또 틀려도 맨땅에 헤딩을 눈물겹게 계속 들이박을 수밖에..



달력의 날짜에 X 표시가 쭉쭉 이어졌고, 축제 무대가 다가오자 멤버들끼리 자발적으로 심야 연습도 달렸다.


강의가 늦게까지 있던 날이면 저녁으로 학식을 빠르게 해치우고 합주실로 향했는데, 방음이 잘 된 컨테이너였지만 밤에 들어보면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드럼소리가 사람 참 감질나게 했다. 얼른 그 속에 기타를 메고 뛰어들고 싶어 다가갈수록 점점 커지는 힙주 소리를 좇아 문을 벌컥 열면 동기들이 비장하게 인사를 받아준다.


술자리에서는 장난기 넘치는 친구들인데, 축제 공연이 다가오자 사뭇 진지하게 각자 맡은 악기를 조율하는 모습들은 동기들이지만 멋있었다. 나도 질 수 없지, 얼른 기타를 꺼내 들고 세팅에 동참했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합주가 힘차게 시작됐다.


내일 강의는 내일 생각하자며 새벽에 합주실 문을 잠그고 나올 때면 늘 귀뚜라미 소리와 밤안개가 자욱했다. 다들 등에 뭘 매거나 손에 뭘 들고서 기숙사로 돌아가던 길에도 공연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피곤했지만 스무 살은 4살 꼬마처럼 할 말들이 참 많다. 한시도 쉬지 않고 떠들며 걸었다.


슬슬 곡이 어느 정도 완성된 것 같으니 무대에서 다 같이 맞출 퍼포먼스 얘기도 하고, 밴드맨들답게 4차원 같은 아이디어를 낼 때면 '에이 미친놈 아냐?' 라는 반응에 이어, 이내 '괜찮은데?' 라며 눈에 광기를 띄우던 우리. 내일의 자신에게 피로를 떠넘기고 무책임하게 야식까지 때렸던 우리. 다음 날 빈사 상태로 등교할 때면 서로 일어났는지 전화 한 번씩 해주던 우리. 그렇게 우리는 끈끈하게 한 데 어울리고 있었다.



축제 D-DAY


오늘만큼은 꼭 틀리길 바랐던 일기예보. 얄밉게 이런 날은 적중이다. 아침부터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더니 초저녁 우리 공연시간까지도 위협했다. 그렇게 축제 무대는 폭우로 지연에 지연을 반복하다 결국 취소 공지가 떴다.


특히 밴드 공연은 악기가 물에 젖으면 치명적이고, 안전 문제도 있었기에 학생회 측의 공지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뭐, 비가 애매하게 왔으면 모르겠는데 확실하게 퍼부어버리니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 그날은 비도 오는데 집에 가서 발 닦고 일찍 잤느냐? 그럴 리가요. 우린 밴드맨이기 전에 철부지 스무 살 아닌가. 장비들을 정리하고 바로 학생회에서 뿌린 우비를 챙겨 입고 학과 주점을 들쑤시러 갔다.


단과대 주차장엔 유명한 포차거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학과 주점들이 즐비했다. 그중 우리 과 주점에 가서 소주도 좀 나르고, 콘치즈도 굽고, 카운터(?)도 좀 보고. 그렇게 우천 취소의 아쉬움을 주점에서 달랬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가 애썼던걸 잘 알고 계신 선배들께서 격렬히 위로해 주셨다.


소주 ㅋㅋ..


야속하게도 축제날 쏟아진 폭우. 그러나 그동안 트레몰로 주법으로 기타를 긁듯 작은 성냥으로 싹 틔운 불꽃마저 꺼트리진 못했다. 아니 꺼지긴커녕, 오히려 밴드와 합주에 대한 욕심이 활활 타올랐다.


밴드 동아리의 다음 무대는 8월에 있을 고등학생 체험 방문 때의 공연과 매년 11월에 있는 정기공연이었는데, 지금은 5월. 다음 무대까지 남은 3개월이라는 시간은 내게 너무 길게 느껴졌고, 결국 재밌는 결심에 이르렀다.


학교 밖으로 나가보자!


이번 합주 동안 즐겁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추구하던 어쿠스틱 밴드의 색채는 옅었지 않았나. 나는 일렉기타 긁으러 여기 온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통기타로 귀결되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과 어쿠스틱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적어도 우리 동아리의 정체성은 록에 가까웠으니, 다음 합주 전까지만 잠시 외부활동을 해보자. 그렇게 네이버에서 유명한 버스킹 카페에 가입했고, 인구수가 많은 서울 쪽 게시판에서 물색에 들어갔다.


통기타는 나를 신촌으로 데려다줬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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