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親舊): Playmate

하프다운 & 엘릭서

by 재룬

20살에게 21살이란 진급과도 같다. 한층 어른이 된 듯한 기분에 의기양양하기도 하지만, 이제 누가 내 나이를 물어봤을 때 너무나도 청춘스러운 그 '20살'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을 풍길 수 없다는 건 약간 아쉬웠다.


그래도 21살은 기대되는 것들이 많다. 학생으로서는 이제 좀 더 심화된 전공과목을 배울 것이며, 새내기로서는 그동안 선배들과 맺어 온 인간관계에 덧대어 이제 '후배'들을 만나니까. 나는 집에서도 막내라 내 밑에 누가 생긴다는 게 참.. 기분이 이상했다.


또한 신입생 특유의 어리바리한 표정과 몸짓 대신 한층 능글맞게 흐느적거리며 진정한 재학생으로 거듭날 것이며, 스웨터와 카디건은 슬슬 내버려 두고 후드티와 맨투맨, 그리고 내 무릎 위치를 너무나도 잘 기억하는 늘어난 트레이닝복 바지 하나면 외출 준비는 끝이다. 이 모든 게 21살이다.


그렇게 겨울방학 끝 무렵 내린 학교 근처 지하철역. 설레는 마음으로 이제는 카카오맵 없이도 기숙사로 성큼성큼 향했다.



신입생 때 두 학기짜리로 계약했던 기숙사. 올해는 하반기에 혹시나 군 입대를 할지도 모르니 일단 한 학기만 살기로 했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2016년 당시 원하는 시기에 군대 가는 게 좀 빡세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군대.. 일단 모르겠고 입대 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대학생활을 충실히 즐기기로 했다.


338호.. 338호..


벽을 더듬어 새로운 내 방을 찾아갔다. 작년엔 11층에 살았었는데 신입생이 아닌 재학생 신분으로 재계약을 하니 3층을 배정받았다. 음.. 관절보호 차원인지 빠른 등하교를 위한 재학생 프리미엄인지, 이유야 어찌 됐건 338호는 시끄러운 휴게실이나 세탁실에서 꽤 먼 구석탱이라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제 남은 건 룸메이트. 이 기숙사는 전 호실이 2인 1실이었으며 룸메는 랜덤으로 배정됐다. 최소한 같은 학번 정도로 묶어주긴 했으나 그 외에는 전부 무작위로 짝을 지어줬다. 학우 간 교류 활성화 뭐 그런 이유였다던가. 작년엔 부산에서 온 얌전하고 좋은 친구였는데 올해도 제발 정상인.. 아니 그전에 일단 나부터..?


338호 앞에 선 나는 무거운 캐리어와 커다란 기타 가방을 든 채 조심스럽게 카드키를 문에 갖다 댔다.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린 문. 낑낑 들어가 보니 현관에 이미 신발이 있네? 고개를 들자 내 새로운 룸메이트와 '어' 하고 마주쳤다. 서로 연신 '안녕하세요'하는데 세상에 그보다 어색한 웃음은 없을 것이다.


서로 각자의 짐을 풀며 스몰토크를 좀 했다. 이 친구는 홍콩에서 오래 살다 왔고 나와 같은 학번, 동갑내기이며 중국어를 전공한단다. 몇 마디 나눴을 뿐이지만 느껴졌다. 상당히 점잖고 매너도 있는 친구라는 걸. 그나저나 내 기타를 보고 시끄러울 거란 생각에 나를 꺼려할까 걱정했는데, 이 친구의 벽장 위를 보니 기타 가방이 있었다.


기타 치는 룸메라니.. 올해 운은 여기에 다 쓴 걸까? 짐 정리를 얼추 마치고 각자 침대에 걸터앉아 노가리를 이어 갔다. 둘 다 '기타 갖고 온 걸 탐탁지 않아 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에 서로 깔깔 웃으며 자연스럽게 음악 얘기로 접어들었다.


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확실히 팝송을 많이 알았고, 유명한 K-POP 외에 국내의 웬만한 노래는 잘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기타를 치는 성향도 독특했다. 통기타, 일렉기타를 딱히 가리지는 않지만 기타 솔로를 주로 친다고 한다. 이유는 코드를 외우기 귀찮아서 ㅋㅋ.. 실제로 아주 기본적인 코드 외에는 아예 외우려고도 하지 않았단다. 코드는 모르는데 솔로는 된다라.. 이게 가능한 건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나는 내 음악 취향을 소개했다. 통기타를 좀 더 선호하는 편이고 아직 코드 위주의 연주는 가능하나 기타 솔로는 서툴다고 했다. 서로 완전 정반대라 되게 흥미로웠다.


나는 코드 되고 솔로 못하고. 얘는 코드 모르고 솔로 되고. , 벌써 환상의 짝꿍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버스커 버스커와 장범준의 엄청난 팬임을 밝히고 대표곡 몇 개를 소개해줬다.


외국 살다 온 친구한테 내게 성경과도 같은 장범준 노래를 들려주면서 이게 입맛에 맞으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괜찮았다. 심지어 다음날 내가 알려주지도 않은 노래 몇 개를 언급하며 무슨 무슨 곡 좋더라 하며 헤드셋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웃겼던 건 얘가 해외파라 그런지 국내 사이트 말고 아이튠즈로 노래를 들었나 본데, 그래서 처음엔 노래 제목들을 다 영어로 알고 있더라. 덕분에 나도 그 제목들의 영어 버전을 다 알게 됐다.


그렇게 우주를 공부하는 나와 중국어를 공부하는 룸메는 어색할 틈도 없이 음악 하나만으로 기숙사 338호를 세미 합주실로 만들어 버렸다. 4캔 만원이던 캔 맥주들과 함께.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밴드 동아리의 시간. 동아리 개강총회 때 고맙게도 가입하러 와준 신입생들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적지 않은 숫자의 후배들이 악기도 다양하게 들어와서 올해 공연도 벌써 기대가 됐다. 뒤풀이까지 야무지게 한잔하고 비틀비틀 방에 와보니 룸메가 아직 안 자고 있더라.


우리 과 밴드 동아리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얘는 자기 과에는 밴드 동아리가 없어 내심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마음 잘 맞는 친구가 있는데 막상 함께 밴드를 할 방법이 없다니. 방구석에서만 기타 합을 맞추기엔 좀 아쉬운 케미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우리 과 사람들만 있는 곳에 얘를 데려가는 것도 서로 좀 뻘쭘할 거고..


방법이 없나 하고 고민을 하던 무렵, 학생회관에서 밥을 먹고 나오다가 내게 딱 필요한 전단지를 하나 봤다. 바로 새 학기를 맞아 중앙동아리 밴드부원을 모집한다는 것. 중앙동아리는 학과, 단과대 단위의 동아리가 아닌, 이 캠퍼스 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동아리였다. 찾았다! 학과가 달라도 함께 밴드를 할 수 있는 방법.


다만 중앙동아리답게 부원 숫자가 감당이 안될 우려가 있어 소정의 오디션을 거쳐 입부를 시킨다고 한다. 평소 서로 눈치 보지 않고 방에서 기타를 마구 쳐댔기에 연습은 꽤 되어 있는 상태였다. 고민도 하지 않고 룸메한테 연락해 여기 오디션 보러 가자고 했다. 당장 오늘 저녁에.


보컬이든 악기든 괴물들이 좀 있다는 중앙동아리.. 일단 부원 모집하는데 오디션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약간 압박감이 있었다. 학생회관 지하 1층에 합주실이 있는데, 그 옆에 거실 같은 곳에서 오디션을 하겠다고 한다. 강의가 끝나는 대로 룸메와 기타를 챙겨 언덕 너머의 학생회관으로..


공연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곡을 2개 연습해 갔다. 당시 이어폰이 꽂힌 내 귀에서 거의 24시간 재생되던 [장범준 2집]. 이 앨범에는 기타의 튜닝이 스탠더드 튜닝(EADGBE)에서 반음 낮춘 하프다운(Half Down) 튜닝이 쓰였는데, 이게 단순히 노래가 반키 낮아진 게 아니라 그로 인한 어쿠스틱의 찰랑거리는 러프한 매력이 극대화되는 장점이 있어 나는 이 앨범 발매 이후로 스탠더드 튜닝은 안 쓰고 있다.


그중에 <사랑에 빠져요>, <자장가를 활용한 신곡>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고, 보여줄 수 있는 기술들도 많아 일찍이 이걸로 낙점했다. 물론 덕후로서의 자존심도 좀 있어 대중적인 곡은 피하려 했고, 장범준이라는 장르가 내 정체성이었기에 중앙동아리에 나를 소개하기에 최적이라고 판단했다.


생각보다 푸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동아리 회장과 만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오디션을 시작했다. [장범준 2집] 특유의 독특한 기타 리프에 회장이 금세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다만 오디션이라 그런지 코드를 잡는 왼손을 뚫어져라 보길래 약간 부담되긴 하더라. 노래 없는 쌩 기타 반주였지만 진지하게 들어줬고 같이 밴드 하자는 답변을 그 자리에서 받았다.


같은 시각 다른 모서리에서 룸메도 열심히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룸메는 일본의 어쿠스틱 듀오 데파페페(Depapepe)<Start>를 준비했는데, 그중 멜로디 파트를 선보였다. 앰프도 없는 통기타로 조용히 내는 선율이었지만 합주실에 오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실력이었다. 아 맞다, 얘 기타 좀 치지? 맨날 방구석에서 맥주 마시고 게임하는 모습만 봐서 잊고 있었다.


우리 둘 다 너무 단출하게 준비해 갔나 싶었는데 그건 중앙동아리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었다. 적당히 준비된 학생이라면 그다음 것들은 들어와서 다 같이 갈고닦아 또 나아가는 그런 느낌이더라. 괜히 쫄았다고 깔깔 웃으며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늘 마시던 캔맥주를 사 왔다. 나는 써머스비(Somersby), 룸메는 기네스(Guinness) 흑맥주. 꿀럭꿀럭 넘어가는 것이 우리 둘 다 목말랐나 보다.



이제 합법적으로 쓸 수 있게 된 중앙동아리 합주실. 그 무렵 우리는 거의 그 합주실에 살다시피 했다. 기숙사에서도 가깝고, 지하인 데다 방음처리가 잘되어 있어서 어디 눈치 볼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마이크와 앰프가 상당히 퀄리티 있었다. 그동안 나는 어디서 뭘로 합주를 해온 것인가.. 여긴 별천지요, 신세계였다.


중앙동아리답게 부원들이 음악뿐만 아니라 악기 자체에 대해서도 잘 아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얻은 지식 중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향후 연주와 연습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스트링(String), 기타 '줄' 관련 꿀팁들이었다.


종전까지는 기타 줄이 그냥 기타 줄이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종류나 업체가 꽤 다양하고 그 특징이 각양각색이었다. 몰랐는데, 내가 통기타를 처음 샀을 때부터 쓰고 있던 줄은 저가의 일반현(絃)이었고 그냥 단순한 쇠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연습을 한참 하고 나면 왼손 끝이 살짝 거무튀튀해지고 냄새 또한 쇠 냄새가 살짝 묻어 나왔던 것 같다.


그러나 이때 알게 된 것이 바로 엘릭서(Elixir) 사의 코팅현. 말뜻 그대로 코팅이 되어 있는 기타 줄이다. 일반 쇠줄과 무슨 차이가 있겠나 싶었는데 처음 만져봤을 때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도무지 기타 줄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 그 기분 좋은 미끌거림에 한 번 놀라고, 코팅현 고유의 그 찰랑거리는 선율에 한 번 더 놀랐다. 물론 그 가격에도 ㅎㅎ..


알고 보니 장범준도 이 엘릭서 줄을 쓰더라. 라이브 영상을 보면 1, 2번 줄이 유독 하얗게 반짝거리는 걸 볼 수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코팅현이라서 그런 거더라. 그래서 당장 줄을 갈기로 마음먹었고 며칠 뒤, 없는 살림 쥐어짜서 장만한 이 엘릭서 줄을 내 기타에 갈아 끼울 때 내가 동경하던 장범준에 한 발짝 다가선 것 같아 매우 성스럽고 경건해지더라.


내가 느낀 코팅현의 장점은 일단 줄이 미끌미끌한 덕에 코드를 빠르게 변환하거나 속주를 할 때 매우 편하고, 통기타의 어쿠스틱한 매력이 한층 배가된다는 것, 그리고 코팅이 벗겨지지 않는 한 줄에 녹이 슬지 않아 수명이 매우 길어서 좋더라. 내 기억에 1년에 2번 정도 줄을 갈았던 것 같다.


물론 같은 엘릭서라도 정말 방금 교체한 싱싱한 엘릭서 줄은 그 음색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좋다. 약간 과장하자면 울리는 음들이 막 공기 중에 날아가버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 통기타에 권태기가 오신 분들, 코팅현 한 번 써보시라. 엘릭서가 사전적으로 만병통치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듯, 그 권태는 완치가 되리라고 확신한다.


기타는 단순히 몸통에 줄 6개 붙어있는 악기가 아니었다. 다양한 튜닝법에, 장비 하나하나에 특징이 확 확 바뀌는 카멜레온 같은 녀석이더라. 중앙동아리에서 하프다운 튜닝과 엘릭서 코팅현을 맛본 21살의 나는 기타를 더욱 진화시키고 싶었고, 분명 그렇게 할 여지가 무궁무진하다고 느꼈다.


통기타는 나를 낙원상가로 데려다줬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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