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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S May 24. 2024

31th 여정. 금지에 대해서 읽고 있습니다.

행동의 금지에서 사랑을 읽어낼 수 있는가. 


서른 하나. 레위기 15장 1절~15절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 그의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든지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막혔든지 부정한즉 유출병 있는 자가 눕는 침상은 다 부정하고 그가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하니 그의 침상에 접촉하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탔던 안장은 다 부정하며 그의 몸 아래에 닿았던 것에 접촉한 자는 다 저녁까지 부정하며 그런 것을 옮기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물로 그의 손을 씻지 아니하고 아무든지 만지면 그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이 있는 자가 만진 질그릇은 깨뜨리고 나무 그릇은 다 물로 씻을지니라 유출병이 있는 자는 그의 유출이 깨끗해지거든 그가 정결하게 되기 위하여 이레를 센 후에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그의 몸을 씻을 것이라 그러면 그가 정하리니 여덟째 날에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자기를 위하여 가져다가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한 마리는 속죄제로, 다른 한 마리는 번제로 드려 그의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서 속죄할지니라






젊은 시절 니체에 심취하였을 때, 구약은 매우 부딪치는 부분이 많았다. 왜 그렇게 금지하는 것이 많은지, 금지가 강할수록 저항하고 싶은 마음은 커졌으며, 그렇게 금기와 싸워서 하나하나 금지된 것을 하게 되었을 때, 또 그렇게 했는데도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 것들을 확인하면서 뭔가 이러한 오만한 습성은 더 강해졌던 거 같다. 


레위기는 이러한 금지가 유독 많은 성경이다.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우리의 제사법도 그렇게 지켜야될 것들이 많은데, 신에게 제사하는 방법이라면, 그 규칙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래서 레위기는 젊은 시절 이후부터 피하고 싶은 성경이었다. 그리고 어쩌다 다시 읽으면, 역시나 불편했던 성경.. 감히 오만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던 성경이었다. 


레위기가 그렇듯, 15장에도 금지가 많이 나온다. 부정한 것이 뭐 그토록이나 많으며, 그렇게 부정하게 된 사람이 다시 정하게 되기 까지가 왜이리나 복잡한지.. 누군가가 유출병이 있으면, 그의 신체와 접촉했던 물건들은 다 부정하다. 유출병 걸린 사람은 그렇게 공동체로부터 소외된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어린 시절의 놀이가 떠올랐다. 친구가 똥을 밟으면, 그 아이를 똥밟았다고 놀리며, 그렇게 놀림 당하는 친구가 쫓아오면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던 일들이..  


그런데 이 구절을 읽는데, 과거와는 달리 전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생각해보니, 코로나라는 전염병으로 인해, 금지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전염병을 가장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은 그 전염병의 보균자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그와 공동체를 분리하여 치료해야 한다는 것임을 2년 이상의 코로나 사태로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바이러스나 점염병의 양상들을 발전된 의료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기원 전15세기였던 출애굽 시절에 이러한 방역 절차를 설명할 방법이 있었을까.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하고 있었고, 더불어 남자장정만 60만이 넘는(여자와 아이, 노인까지 포함하면 아마도 200만명 정도로 추정) 집단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집단에 감염 질병이 발생하면,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종교 규율로서의 엄격한 금지는 실상 이 공동체를 살리는 애정어린 신의 처방일 수 있다. 


내게는 26개월 딸아이가 있다. 이 녀석이 요즘 말문이 조금 트였다고 말끝마다 "이거 뭐야?"를 묻는다. 그런데 내가 그 이유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를 못한다. 어린이집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개똥'을 집는다. 더러워서 '안돼'라고 하니, "이거 뭐야?"라고 말한다. '개똥'을 집고 이어지는 "이거 뭐야?"라는 질문 지옥.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친절한 답변이 아니라, 아이에게서 당장 '개똥'을 뺏어서 멀리 던져버리고, 손을 빡빡 씻긴 다음에 "그거 지지"라고 반복 주입하고, '만지면 안돼'라는 것을 확실히 알리는 행위이다. 단호하게 금지를 알리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금지될 때마다 내 딸은 서럽게 운다. 아빠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못하게 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닭똥같은 눈물을 사정 없이 흘린다. 어쩌면 내 딸은 성장하면서 자신에게 금지된 것에 저항하며, 자발적 의지로 기꺼이 '개똥'을 잡고 흔드는 삶을 살 수도 있다. 금지 자체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 생각해서 무조건적인 반항을 할 수도 있다. 나의 20세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나의 모습처럼.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하면 나는 마음이 참 서운할 것도 같다. 내가 딸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금지한 것은 지금 그 아이를 이해시킬 방법이 없지만, 그것이 명백하게 아이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내가 내 딸을 아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명백한 금지로 나타날 수도 있다. 아.. 나는 그동안 내게 금지된 것에 대해서 답답함을 경험하며, 금지된 것들에 저항해서 그것을 부수기에만 집중했 왔다. 그러면서 그 금지에 담겨진 나를 향한 명백한 신의 사랑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 딸이 나에게 했으면 매우 서운했을 행동을 내가 하나님께 하고 있구나. 


물론 나의 금지는 신과는 달리 다 옳을 수 없다. 그러기에 내 딸은 성장하면서 내가 정한 어떠한 금기는 부수고, 어떠한 금기는 지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내 딸이 내가 무엇인가를 금지한 이유가 '자신을 향한 아빠의 사랑'이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 장면을 꿈꾼다. 


혹시, 하나님께서도 무엇인가를 금지한 자신의 마음을 그 자녀들이 이해하게 되기를 꿈꾸고 계시는 것은 아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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