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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S May 15. 2024

넷. '용언'을 이용한 자기표현 에세이

용언의 행복 - 방현지

하나고 마지막해 고3 친구들을 가르치면서, 고3들에게 '문법단위를 이용한 자기표현 에세이' 수행평가를 실시했었다. 이것은 내가 교사로서 진행한 마지막 과제였다. 이 과제를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 아이들 졸업 선물로 배부했었다. 그런데 책장을 정리하면서, 이 책을 발견했다. 다시 읽으며, 제자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 중 몇 개를 소개한다.


                        용언의 행복


                    2016년 고3 하나고 5기 방현지


내가 잘난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하나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지금까지도 나를 따라 다니며 괴롭히고 있다. 그러나 타고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음에도 하나고등학교가 나에게 안겨준 패배감은 일반적인 실망감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주어다. 친구들을 이끌지 못하면 그에 견디지 못하는, 마치 폭군 같은 리더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불안해했고, 나를 도와주려는 친구들의 손길에 많은 불만을 가졌다. 겉으로 불만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사실 친구들은 나의 성격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나 자주 기분이 상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야 중학교 친구들을 떠올리면 미안한 감정밖에 떠오르지 않는 이유이다. 그 당시 주어의 역할에 마음껏 흥취에 젖어 있던 과거의 나는 '도움'이나 '협력'의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용언은 굉장히 역동적이면서, 도움이 필요한 주변의 누군가를 챙겨주기를 꺼리지 않는다. 하나고등학교가 내게 선사한 가르침은 용과 같다. '자만하지 말고, 너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될 것.' 그러나 나는 묵묵히 뒤에서 지켜주는 역할을 자처하게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내가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패배감'이다. 패배보다 더 무서운 것이 패배감이었다. 남에게 지는 것이 두렵기보다, 그들과 나를 비교한 때 느끼는 모든 감정들 더 두려웠고 그렇게 쌓인 패배감은 스스로를 초라한 존재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즈음에는 주변 친구들에게 '성격이 왜 이렇게 소심해졌냐. 입학식 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2년 전의 나는 아마도 남과의 비교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살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조금씩 갉아먹던 나의 자존감은 2학년 1학기에 바닥을 보였고, 공평한 평가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시험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소중한 시간들을 허비했다. 그리고 나는 반복된 허비 속에서 긍정적인 체념의 중요성을 상기했다. 내가 못하는 일을 빠르게 인정하고 대신 친구들의 점을 자세하게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과 내가 지나갔던 소중한 잠재력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현재는 자적인 자괴감은 적당히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변형시켜 주체들과 조합하는 용언의 모습에서 자신의 희생으로 남을 한 단계 성장 시켜주는 모습을 본다. 나는 다행히도 친구들이 나에게 고민을 털어낼 때면 그에 맞는 방식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작은 능력은 갖고 있다. 친구들의 고민을 듣고 조언해주는 순간에는 자신을 낮주는 겸손의 자세를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데 가끔은 그런 나의 모습에 놀라고는 한다. 그리고 친구들을 도와주고자 시작했던 상담은 오히려 내가 성장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 조용히 성장하고 있어 알아보지 못했지만 중학교 시절의 나를 돌아본다면 현재의 나는 정말 많은 계단을 올라와있다. 잘나지 않아도, 타고나지 않아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순간들에서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고, 자신의 존재를 낮추게 되더라도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위로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자괴감이라는 감정이 실제로는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용언은 주체와 동일하게 자리하며 성장하기도, 가끔은 친구들을 수식하는 존재가 되어 그들을 더욱 빛나게 해주기도 한다. 굉장히 멋있는 일이지만 그 만큼의 희생 또한 필요한 자리이다. 그럼에도 나는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용언 같이 그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용언의 행복은 자신을 낮추고 친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태도에서 시작되고 있다.



현지 - 나와의 접점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학교에서 잘 눈에 띄지 않는 친구였다. 겉모습으로는 편안해보였던 친구... 졸업을 앞두고 이녀석이 쓴 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성장통을 겪어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근사한 모습으로 성장했다. 이녀석의 성장에 내가 거의 기여한 게 없다. 그럼에도 제자의 성장을 엿보는 것은 감격스럽다. 이렇게 멋지게 계속 나아가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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