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는 블라디보스톡에 비해 훨씬 크고 복잡했다. 도일랏은 우리가 염려되었는지, 기차표를 구입해주고,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나서야 자신의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도일랏 덕택에 모스크바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따뜻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도일랏과 믿음이와 헤어지고, 미리 예약한 숙소를 찾아갔다. 숙소 예약은 호텔스닷컴을 이용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1시가 조금 넘었다. 캡슐 호텔이었는데, 예상보다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체크인을 하고, 제일 먼저 샤워를 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있는 7박 8일 동안 하지 못했던 샤워부터 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겨울에 타야 한다. 무려 8일 동안 간단한 세안을 제외하고는 씻을 수가 없는데, 아마 여름이었다면, 악취가 제법 심했을 것이다. 뭐, 겨울에는 오랫동안 안 씻어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그리고 발레 공연을 보기 위해서 볼쇼이 극장을 찾아갔다. 숙소에서 4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기 때문에, 가뿐하게 걷기로 했다. 나같은 길치조차도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구글지도의 위대함에 감탄한다. 볼쇼이 극장의 여정은 예상하지 못한 번개였다.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하나고 2기 제자이자, 서울대 노어노문과에 재학 중인 김하진. 하진이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실업자가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옛스승이 걱정이 되었는지, 모스크바 첫날의 일정을 함께 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해외에서 한국 사람만 만나도 반가운 법인데, 제자를 만나는 것이라니... 교사라는 직업은 너무도 보람있는 일이었다.
원래 볼쇼이 극장 발레표는 대략 2등석이 대략 6만원~8만원 정도를 한다. 그런데 모스크바 소재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은 학생증을 제출하고 본인을 확인하고, 티켓을 2천원에 구입할 수 있게 한다. 하진이가 이를 알고, 지인인 남자 동기에게 학생증을 빌려웠다. 학생증 주인은 나보다 15살 정도 어린 녀석이었는데, 나의 외모가 40세를 넘으며 오히려 회춘을 하고 있나보다. 무사통과했다. 신기해하는 내게 하진이가 이야기해온다. 우리가 비둘기를 보면, 나이든 비둘기하고, 젊은 비둘기하고 구분하지 못하잖아요. 서양인들도 동양인들 보면, 그 구분을 못하는 거 같아요. ㅋㅋㅋ
좌: 하진이 남자 동기의 학생증 우: 이 학생증으로 대학생 대상 특별 티켓을 발급받고 좋아하는 40세 남자
발레 공연을 시작하기 전까지, 근처에 있는 <붉은 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을 돌아다녔다. 이름으로만 들었을 때는 무언가 굉장히 무서운 느낌이었는데, 직접 가서 봤을 때는 설렘이 더 컸다. 그 넒은 광장에 가득차 있는 사람들. 이들에게도 동양인을 보는 것은 낯선 느낌이었는가보다. 주위를 설렌 시선으로 쳐다보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쌀쌀맞음보다는 호의가 더 많이 담겨 있었다. <붉은 광장>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 어린이처럼 들 뜬 모습으로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테트리스 게임을 할 때 배경으로 본 기억이 있던 성 바실리 성당을 발견하고, 매우 좋아라했었다. 이후로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까지 매일 <붉은 광장>을 방문하는 것이 나의 중요한 일과였다.
하진이와, 저녁 식사를 하고 볼쇼이 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봤다. 우리를 제외하고는 당연히 다 러시아 사람들이었다. 신기한 것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멋진 드레스를 입고 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멋진 옷을 입고 온 만큼, 그들의 표정도 행복해보였다. 나는 그간 형식과 격식을 의미없는 것으로만 여겨 왔었는데, 필요할 때 격식을 갖추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화 2,000원에 예약한 우리의 자리는 무대 왼쪽 상단 경사면에 있었다. 당연히 시야가 어느 정도 제약이 있었지만, 공연을 감상하고 즐기는 데에는 충분히 좋은 자리였다. 이 훌륭한 공연을 2천원에 관람할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 평생 가장 보람있게 사용한 2천원이었다.
좌: 대학생들에게 싼 가격으로 판매되는 볼쇼이 극장 좌석 우: 볼쇼이 극장 발레
공연이 끝나고 하진이에게 연신 고맙다고 했다. 실업자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이제 2주 가까이 된 셈인데,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하진이와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이국적인 모스크바의 야경을 보면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오늘은 신기하게도 여러명의 제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선 대원외고에서 가르쳤던 축구를 좋아했던 민상이라는 제자가 네덜란드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근처에 오게 되면 들려달라는 했고, 독일에서 유학 중인 하나고 제자 상현이가 독일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내가 이 친구들에게 적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구나. 이제 실업자가 된 처지에서, 내게 무엇이 남아있는가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는 더욱 깊이 고민하며 찾아야하겠지만, 12년간 선생이었던 내게는 나와 함께 고민하며, 교류했었던 제자들이 있었다. 그 사실에 감사했다.
사십춘기 방랑기 D+13일(2017.3.22.) 러시아 모스크바
전날 새벽 2시가 넘어서 잠이 들었지만, 새벽 6시경에 잠이 깼다. 아무래도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듯 싶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함께 탔던 믿음이가 이제 자신만의 여행 일정을 위해 슬로바키아로 출국을 해야해서, 공항까지 배웅을 하기 위해 만났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3박 4일을 머무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도 넉넉하고, 모스크바에서 둘러봐야 할 곳은 전날 충분히 봤기 때문에, 배웅도 하고 공항 사전 답사도 할 겸.. 공항으로 가는 믿음이를 따라 나섰다. 믿음이는 준비성이 철저하고 길눈도 밝아서 가야할 방향을 척척 찾아냈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뒤따라가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수속 후에, 믿음이와 작별을 하는 상황에서 생각보다 마음이 찡해졌다. 25살의 젊음아.. 그 여정을 응원한다. 인연이 되면... 인도에서 만나보자. 건강해라 .
둘이였다가... 혼자가 되어서 돌아오는 길... 사뭇 모스크바가 낯설어진다. 나는 어디인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공항기차로 타고 왔던 방법이 아니라 일반 버스를 이용해서 붉은 광장 쪽으로 오기로 마음 먹고, 구글 지도를 이용해봤다. 길눈이 어두운 나같은 인간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아, 정말 구글의 힘이란...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렇게, 모스크바 대중교통 체험을 했다. 버스와 지하철 모두 거리에 상관없이 55루블(대략 1100원) 환승 할인은 안된다. 안내 방송은 아무리 들어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버스는 구글지도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으로 내릴 곳을 찾고, 지하철에서는 나의 위치 확인이 어려워서, 그냥 근처에 있는 러시아 사람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한국말로 물으면 정차역으로 노선도에서 가르쳐준다. 그렇게 2시간 정도의 이용을 통해서 러시아 대중교통과 친숙해졌다. 어제는 도일랏냑의 도움이 없이니 아무것도 못할 거 같았는데, 하루만에 나름 모스크바 대중교통을 척척 이용하는 수준이 되었다. 러시아 지하철은 정말 깊고, 에스컬레이터는 빠르다. 버스는 차도 많이 막히고, 매연이 심해서, 추천하지 않는다.
원래 외국인 울렁증이 있었는데, 도일랏과 시베리아 횡단 열차 기간 동안 동행하면서, 아주 조금이나마 극복이 된 듯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계란을 사서, 무려 숙소에서 오므라이스를 했다. 외국인들이 주방에 왔다갔다 많이 했는데,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요리해서 먹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숙소에서 요리할 생각 조차를 못했었는데, 뭔가 여행 초보가 한 단계 성장한 거 같아서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제대로 장을 봐서는 하루종일 숙소에서 요리를 했고, 산책 삼아 <붉은 광장>을 다녀온 것이 모스크바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굳바이 모스크바.. 굳바이 러시아!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도움을 청하면 흔쾌히 도와주는 츤데레같은 이들이 모인 곳. 이제 다음 국가는 '우크라이나'이다. 전지현이 밭을 갈고, 김태희가 식당에서 일한다는 말이 밈으로 떠도는 그 우크라이나.
공항까지 가는 길.. 신호등도 빠르고.. 에스칼레이터도 빠르고.. 지하철도 빠르다. 빠름빠름.. 첫 여행지로 러시아가 참 좋았다.
ps.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7년 전에 러시아에 이어서 우크라이나를 찾았던 기억 때문인지, 두 나라가 다 좋았던 나는 마음이 편치 않다. 그저 바라기는, 이 전쟁이 어서 그치고, 두 나라의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