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로 거의 정상까지 올라간다는 말을 놓칠 리 없다. 이제 무릎에 무리 가는 산행은 되도록 피한다. 솔직히 일월산인지 일출산인지 이름도 정확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직 '자작나무 숲'에 마음이 폭발했다. 그런 일월산에서 새로운 만남이 있었으니.
동트기 전 출발, 중앙고속도로는 안개로 수묵화 속을 달리는 듯했다. 산등성만이 하늘과 경계를 알려준다. 영양가는 길은 멀었고, 병풍처럼 둘러싼 산허리에 빼꼼히 숨통 트이듯 길이 나 있다. 일월산 1219m, 정상 가까에 있는 KBS 송신소까지 차로 갈 수 있어 어렵지 않다. 송신소 정문에서 정상 가는 길은 왼쪽, 오른쪽 어느 방향으로 가든 정상에서 만나지만, 길 모습은 다르다.
왼쪽은 좁고 뒤죽박죽 제멋대로인 돌길이다. 헛디디면 분명 어딘가 부서질 거 같아 발에 힘이 들어간다. 아래만 보고 걷다 고개 드니 길 따라 돌과 나무를 포근히 덮은 이끼가 눈길을 잡는다. 녹색 이끼 이정표가 무채색 산속을 조용히 안내한다.
낮은 모습으로 엄마 품속 같은 이끼,
'모성애'
꽃 없는 이끼 꽃말이다.
극단적 환경을 좋아하고, 지구에서 가장 험한 환경에서도 자생한다는 이끼. 바다에 살던 조류가 육지로 나온 최초의 육상 식물. 뿌리는 물을 흡수하기보다 몸을 지탱해준다는 이끼. 위보다 옆으로 옆으로 얽히고설키고 부대끼며 자라는 이끼. 공기의 습기를 먹고 산다는 이끼가 이렇게 이쁜 적 있던가? 새로운 만남이다. 축축한 곳이면 어디든 뿌리내리고 철썩 주저앉는 이끼. 너무 흔해 귀한 줄 모르겠는 이끼. 오히려 지렁이라도 나올 거 같아 무서운 이끼. 사람 손길을 원치 않아 보이는 이끼. '옛것'같은 이끼. 살면서 이끼 앞에 잠시라도 멈춘 적 있던가? 시선을 주며 이끼 앞에 멈췄다.
뉴질랜드 밀포드 트랙은 이끼 천국이다. 이끼보다 흙 보기가 더 어려운 그곳, 밀포드 트레킹 하면서 만난 이끼는 이끼인지 이끼 나무인지 구별이 안 된다. 이끼 숲이라 해도 좋을 만큼 그들 세상이다. 그런데 그곳보다 듬성듬성한 이곳 이끼가 더 이쁜 것은, 눈길 멈추게 한 것은, 갈 길 멈추게 한 것은 뭐지? 그때는 지나침이었고 이번은 만남이다. 그때는 풍경이었고 이번은 찰싹 눈에 붙는 순간이다. 일월산의 봄이, 나의 봄이 이끼에서 먼저 핀다.
길을 아껴가며 천천히 걷는다. 약간 오르막길 끝에 일월산 정상 조형물이 있다. 옆에 공군기지가 있어 접근 금지 펜스가 쳐있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해와 달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다 하여 일월산. 정상에는 계단식 무대같은 넓은 해맞이 전망대가 있다. 무대에서 청중 보듯 멀리 쳐다보니, 굽이굽이 산자락이 열두 폭 치마다. 날씨 좋으면 동해도 보인단다. 이 무대를 우리 말고 독보적으로 즐기는 자가 있었으니, 네발 나비다. 친구가 알려준다. 나뭇잎에 낳은 알이 따뜻한 날씨에 미리 나온 것 같다고. 노란색 나비가 껑충 날아간다. 훼방꾼이었나? 나에게는 호기심과 반가움이었고 너에게는 침략자구나. 다가가니 아랑곳하지 않고 더 멀리 간다.
오른쪽으로 주차장까지 나오는 길은 햇빛이 넘친다. 바위도 이끼도 볼 수 없다. 물푸레나무와 참나무가 액자 속 그림 같다. 바스락바스락 나뭇잎을 밟으며, 미끌미끌 햇빛을 밟으며 걷는다. 솜이불같은 낙옆 속에서 후다닥 봄이 나올거 같다. 햇빛, 낙엽, 참나무의 놀라운 삼위일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