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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 Jul 03. 2022

때론 격하게, 때론 시크하게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 지성사, 1992)을 읽고

‘열심히 살자. 사랑도. 1992년 8월 13일. 혜화동에서’

  그 후 2021년 7월 어느 날 다시 그녀의 시집을 열었을 때, 위 문구가 시집 첫 장에 쓰여있었다. 빨간색으로. 1992년 5월에 출간 한 허수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다. 아마 이 시집은 그해 여름 방학에 슬프지만 뜨겁게 읽고 덮은 후, 이번에 열어 본 것이니 거의 30년 만이다. 그동안 몇 번의 이사 때마다 버리려고 간추린 시집들 사이에 용하게도 살아남은 시집이다. 버리려 책꽂이에서 뺐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은 시집을 잡을 때마다 그때의 참혹함이, 뜨거운 느낌이 손끝에 묻어있기 때문이리.


  시집은 4부로 되어있다. 1부는 사랑이다. 그것도 '술 취해 비 맞고 서있는 불우를 노래'하는 사랑이다. 1부를 읽고 나면 상처고 혼동이고 정신이 아득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며 그녀의 사랑은 자신보다 먼저다. 치열했던 사랑도 결국은 혼자 가는 먼 집으로 응축된다. 그 치열함, 열정, 상처투성이의 사랑도 결국 킥킥 울음인지 웃음인지 관조하는 듯한 모습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그거 별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랑도 이제 마음에 묻어 버리고 '진설 음식 없이 술 한 병'으로도 충분하게 떠나보낸다.


  2부로 들어오면 사랑에서 조금 비껴 서서 바라본다, 시선은 좀 더 다양해지고 넓어진다. 사랑에서 빠져나와 이제 나비도 ‘아픔이지만 즐거움의 환호’이다, 서울에서의 녹녹지 않았던 삶의 모습도 보인다, 젊은이는 결국  '늙은 가수'가 된다. 아직 20대인 여자는 내일의 노래가 없는 인생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늙은 가수다.


  3부에서는 사람에 대하여 특히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며 옛 시절을 그리워하지만 결국은 삶이란 돌고 도는 것이다. 그리움의 눈물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막내와 그리워한다. 우울한 도시의 생활에 지쳐서 한 발짝 물러난다. '사는 게 시시껄렁하여 봄날은 가고 기차도 가지'만 결국은 인생은 '자전거 동심원'같이 순환하며 그 힘으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4부 이제 그녀 삶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점점 더 현실의 삶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지만 더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을 생명을 만진다. 지금 기억하는 세월이란 함께했던 문 앞에서 이제는 혼자 와서 바라보는 ‘심술궂은 얼굴’이었고 ‘썩은 기억’이다. 이때까지 그녀를 무섭게 버티게 해 준 게 ‘시’이다. 이런 시를 버리고 ‘문자도 없이 문서도 없이’ ‘문명의 바깥으로’ 떠난다. 아주 홀가분하게. ‘환하게’ 그녀가 살아온 세월은 아직도 그녀를 잡지만 그녀는 정주하지 않는다. 삶이란 혼자 가는 먼 집인 것이다.


  갑자기, 훌쩍 독일로 떠나간 그녀는 그곳에서, 상처였던 이곳의 세월을 잊을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영상을 보는듯한 이미지도 좋다. 30년 전 그 시대를 살아왔는데 지금 보니 문장이 뭔가 그 시대 느낌이 난다. 현재 나오는 시집 문장과는 다름이 느껴진다. 뭔지 모를. 그것도 좋다.


  1992년 여름에 읽었고 그녀를 잊었고 2018년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매스컴을 통해 알았다. 그녀의 명복을 빈다.

                                                               


*허수경의『혼자 가는 먼 집』첫 번째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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