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앞에 천사가 있는 줄 알았다. 마음이 빗장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따라갔다. 연신 감사하다고 말하며. 돌멩이 사이로 여행 가방 바퀴가 잘도 굴러간다.
여행의 일상은 기상 시간부터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 갈지, 무엇을 탈지 등등 무수한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이 모두 만족을 주지 않는다. 실패도 있지만, 그 또한 ‘여행’이 주는 덤이라 생각하며 따뜻이 껴안는다. 여행은 순간순간 자신이 선택해 그리는 그림이다. 이란의 아름다운 사원 도시 에스파한에서 수사를 경유하는 아흐바즈행 버스를 탔다. 초가잔빌의 지구라트를 보기 위해서다. 숙박 비용과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밤 9시 버스를 택했다.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며 밖을 보니 유리창에 피곤한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운전기사의 '수사'라는 말에 퍼뜩 내렸다. 새벽 6시, 내린 사람은 두 명. 건물 안에 있는 터미널이 아니고 시골 동네 길바닥이다. 주위는 컴컴했고 보이는 것은 저만치 걷고 있는 같이 내린 사람뿐이다. 어슴푸레 스카프를 쓴 모습이 여자다. 다급하게 불렀다. 이란 여행 20여 일쯤에 일어난 일이다.
그녀를 따라가며 토막말 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현관 불이 환하게 켜지고, 그제야 그녀가 눈이 깊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마샤의 어머니가 반긴다. 아버지, 여자 동생, 7살 남자 동생이 가족이다. 마샤는 에스파한에서 대학을 다니고 그날은 집에 오는 길이었다. 아버지는 수학 교사다. 같은 교사라는 이유로 더 반가웠다. 불쑥 나타난 작은 동양 여자로 인해 그들의 새벽은 부산했다. 이란-영어 사전을 보며 대화했다. 지금 같으면 번역기가 있으니 수월했을 텐데 2007년의 내 휴대폰은 스마트 폰이 아니었다. 남자아이가 옆에서 연신 손짓 발 짓을 한다. 태권도란다. KBS-WORLD 방송을 시청해서 알고 있다고. 그러면서 채널을 돌린다. 이곳에서 한국 방송을 볼 줄이야. 꼬마의 환영 태권도에 뭉클했다. 평소 애국자도 아닌데 떠나면 애국자라더니. 꼬마가 계속 태권도를 하는 바람에 다소 어색한 시간을 웃으며 보낼 수 있었다. 바닥에 식탁보를 깔고 빙 둘러앉아 식사했다. 흰쌀밥이다. 쌀밥과 이름 모를 반찬으로 양껏 먹었다. 여행자의 뜨거운 아침 식사다.
마샤 아버지께서 운전하고 마샤와 여자 동생과 함께 지구라트에 갔다. 집에서 가깝지 않았다. 심야 버스 탈 때 ‘수사에서 내려 대중교통으로 가면 되겠지’라는 생각은 너무 무모했다. 그곳까지 가는 대중교통은 없었고 택시로만 가능했다. 그 어리벙벙한 계획 덕분에 마샤를 만나는 사람 여행을 했다. 빛과 그림자는 늘 같이 있다.
초가잔빌은 지역 이름이며, 지구라트는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계단식으로 쌓은 성탑이다. 일종의 피라미드로, 바벨탑도 지구라트다. 3천여 년 전에 지어진 붉은 벽돌만 덩그러니 있는 그곳을 간 것은 세계 문화유산이며 최고의 지구라트란 이유뿐이었지만, 15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앞으로도 잊히지 않을 생생한 여행 역사다. 그것은 유적보다 사람에게 받은 환대가 무엇인지 알기에. 허허벌판에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지구라트는 5층이었는데 지금은 3층까지 남아 있다. 차곡차곡 쌓인 붉은 벽 좁은 길을 그들과 발 맞추며 걷는데 문득 전생에 이곳에서 뛰어 다닌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벽돌만 남아 있지만, 문자가 쓰여 있는 벽돌도 있다. 기원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신 숭배'는 같은 마음인가 보다. 탱탱하던 햇살이 힘이 빠져 붉은 벽돌을 딛고 그들 얼굴에 떨어지니 같이 붉어진다.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붉어진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북적북적 사람이 모였다. 일곱 명쯤 된다. 그날은 무슨 기념일이고 외부 방문객인 나를 위해 근처에 사시는 친척들이 모였단다. 어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동양 여자를 처음 봐서 구경 온 줄 알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방문객을 환대하는 게 이란의 전통이란다. 그들에겐 전통이고 나에겐 신세계다. 아침보다 둘러앉은 원이 더 커졌다. 저녁 식사는 화덕에 구운 넓적한 빵과 쌀밥, 여러 가지 반찬이다. 마샤가 간간이 통역하고 난 그저 웃는 얼굴로 그들의 환대에 보답했다. 차를 마시고 돌아가는 그들에게 우리 집에 오신 손님 배웅하듯 인사했다. 긴 하루였다. 마샤 방에 둘이 누웠다. 편안하다. 오랜 친구 집처럼. 이십오 년 나이 차이도, 언어 때문에 별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래된 친구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강이 아닌 것처럼.
이튿날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었고 그 후 열흘 정도 더 여행하다 귀국했다. 나에게 찰지고 빛나는 여행을 만들어준 그녀에게, 적어 준 주소로 선물을 보냈다. 그런데 답장이 없다. 선물이 제대로 도착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때 적어 준 주소도 분실했고, 다시 연락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낯선 여행지에서 타인의 신뢰와 환대는 여행자에게 사무치는 고마움이다. 여행자를 보면 마샤처럼 집에 데려오지는 못해도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가끔 이런 상상도 한다.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누르는 내 모습을. 새벽에 그녀가 눌렀던 그 초인종을. 지금은 중년이 되었을 그녀와 그 가족의 안부가 궁금하다. 세상이 위독하니 더 궁금하다. 그리고 기원한다. 그분들이 늘 행복하고 건강하시길.